부처를 믿으니 스님이요, 파계로 환속했으니 거사(居士)였다.
원효(元曉'617~686)는 전국 곳곳을 누비면서 때로는 노래로, 때로는 춤으로 중생들과 만났다. '명주실이 아니라 왕골이나 띠풀과 같은 하잘것없는' 백성들과 함께했다. 민중의 개념을 1천300년 전에 알았고 그들을 위해 실천했던 혁명가였다. 이름처럼 '시대의 새벽'이 되고자 했던 원효.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과연 그는 무엇을 남겨 놓았는가.
◆혁신(革新)과 화쟁(和諍)은 21세기의 화두
경주대 최현탁 교수는 기다리는 외국인이 한 사람 있다. 경주에서 외국인 방문객 안내도 했던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언론인 출신으로 현재 태국서 불교 공부 중인 토니 맥그리거(캐나다) 씨. 2009년 경주방문 때 원효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그를 분황사 등으로 안내했다고 한다. 최 교수는 "그는 서민, 백성들과 함께했던 원효의 사상이 매우 현대적이었다고 평했다"며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그의 행적을 높이 평가한 것 같았다"고 전했다. 맥그리거는 원효 길을 순례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한다.
원효학연구원 윤혁권 사무국장(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도 지난 2009년, 2010년 잇따라 경주에서 만난 영국 언론인을 기억했다. 원효학술대회에도 참석한 그는 국내 원효 발자취 탐방을 바탕으로 영국에서 책 발간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한다. 원효의 화쟁사상에 관심 있던 그 언론인은 경주~경기도까지 추천한 원효의 '구도 길'을 따라 탐방한 뒤 귀국했다고 윤 국장은 덧붙였다.
원효는 살아 있었다. 원효 스님의 사상에 매료된 개인이나 단체의 문의접수나 방문이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원효 관련 세미나 등에는 일본 중국 유럽 미국 등 해외 전문가의 참석도 많다.
특히 일본에서 관심이 높다. 스님의 영향이 컸고, 정토(淨土)사상이 일찍 뿌리내렸기에 원효에 대한 연구 깊이도 상당한 수준이다. 원효학연구원 이평래 원장은 "도쿄대 대학원 불교 관련 학과시험에는 거의 해마다 원효에 대한 시험문제가 출제될 정도"라고 했다. 일본 고산사(高山寺)의 원효 및 의상 두 스님의 생애를 그린 그림 '화엄연기'(華嚴緣起)는 국보로 지정돼 있다. 윤 국장은 "어찌 보면 원효 연구는 우리보다 일본이 더 앞섰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보조(普照)'서산(西山)과 함께 원효는 3대 고승이고 그 중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오늘날 한국 역사 인물 중 가장 많이 회자(膾炙)된다. 또 500명 넘는 박사급 불교 전문가의 불교인물관련 연구논문'저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고 그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는 국내 사찰만도 80~100여 개 안팎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다.
이 같은 분위기는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남북분단, 동서분열, 남남 보혁갈등, 노사분쟁, 빈부격차, 수도권'국토 불균형, 종교다툼 등으로 찢긴 민심 치유에 원융회통(圓融會通), 화합, 통합을 설파한 원효의 '일심'화쟁'무애'의 사상이 도움될 것으로 분석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2006년 경북도가 펴낸 '역사 속 경북의 혁신인물' 제작에 참여한 위덕대 채종한 교수는 "삼국 간 전쟁, 당시 신라사회의 종파 갈등, 신(新)'구(舊) 유식(唯識) 논쟁과 분열에서 벗어나 화엄경이 추구하는 평등세상, 하나 되는 신라를 위해 파계까지 하면서 실천에 옮기는 파격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라 말했다.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도(道)를 얻으니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心生故種種法生)/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니며(心滅故龕墳不二)/ 또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又三界唯心)/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네(萬法唯識)/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心外無法)/ 어떻게 따로 구하겠는가(胡用別求)/ 나는 당에 가지 않겠다(我不入唐)."
귀족의 아들로 길에서 태어난 원효. 출가했을 때부터 배움은 치열했다. 그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 그대로 나타났다. "좋은 음식으로 길러도 이 몸은 무너질 것이고, 부드러운 옷으로 보호해도 목숨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수행이 없는 빈 몸은 길러도 이익이 없고, 덧없는 목숨은 아껴도 보전하지 못한다. 백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라고 닦지 않고 방종하랴. 내일 살기 기약 없고 오늘은 이미 저녁, 아침부터 서둘러야 하리라."
그 결과 80부 150여 권(혹은 100여 부 240권)의 저술을 남겨 신라 승려 가운데 최고였다. 송고승전(宋高僧傳)은 '웅횡문진'(雄橫文陳'문장의 전장을 영웅처럼 누빈다는 뜻)이라고 했고 "신라에선 만인지적(萬人之敵'모든 사람들을 대적할 만함)이라 불린다"고도 기록했다.
종파도 스승도 없었다. 스스로 배움을 얻었다(無師自得). 45세 때인 661년 두 번째 유학길에서 무덤 속 해골 바가지 물을 마시고 나서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깨달음. 유학은 필요없었다. 파계도 서슴지 않았다. 신라인의 주체성과 역발상, 발상의 전환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지 않겠는가(誰許沒柯斧),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하니라(我斫支天柱)"라며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딸 요석 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았고, 승복도 벗었다. 45년간 설법하며 중생 구제에 나섰다 길에서 열반한 부처처럼 그 역시 길에서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구하고 평등세상, 하나 되는 세상을 위해 길로 나섰다. 왕족, 귀족불교에서 내려와 서민불교 대중불교로의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옳지 않다'고 하거나, '나는 적절하지만 남들은 적절하지 않다'고 하는 논쟁을 모두 포용해 한 차원 높은 통합을 시도했던 그의 정신은 도교의 장자(莊子)와도 통했다. 그로 인해 신라의 유불도(儒佛道) 3교(敎)의 조화, 융합은 이루어졌다. 후일 최치원이 말한 현묘지도(玄妙之道), 풍류(風流)와 같았다.
◆대중불교의 '첫 새벽'을 열다
원효에게는 출가와 세속이 다르지 않았다. 그는 "출세법(出世法)은 세간법(世間法)을 치유하는 법이고 출출세법(出出世法)은 출세법을 치유하는 법"이라고 한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실천했다.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의 "출가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재가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과도 통했다. 환속해 소성거사(小姓居士)로 살면서도 오히려 더욱 교화, 포교에 정진했다. 더 자유로웠다.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그의 포교방식은 파격적이었다. 원효학연구원 이평래 원장은 "백성들에게 포교를 위해 오늘날 활용되는 '춤, 노래 이야기'를 잘 활용한 재주꾼이었을 것"이라 말했다. 눈높이 포교에 천부적인 재질을 보였다는 의미다.
그래서 지은 노래가 '일체의 걸림이 없는 사람은(一切無碍人)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一道出生死)'는 '무애가'(無碍歌)였고, 지금도 일부 전한다는 '미타징성가'(彌陀證性歌)였다.
그 노래는 높고 낮은 담을 넘어 온 거리와 마을에서 불렸다. 무애춤(無碍舞)도 췄다. 불교설화를 인용한 '스토리텔링'도 활용했다. 신라인 누구나가 '나무아미타불'이란 간단한 염불을 외웠다. 사바의 이 땅이 정토(淨土)였고, 불교는 의지처가 됐다. '입'에서 '입'을 통한 전파, 즉 '입보시' 효과가 대단했을 것이다. 오늘날 선거에서 활용되는 로고송이나 구전(口傳)홍보처럼.
송고승전은 "어떤 때는 소반을 던져 중생을 구하기도 했고 때로 물을 뿜어 불을 껐으며, 때로는 여러 곳에서 동시에 모습을 나타냈다"고 했다. "그의 발언은 미친 듯 난폭했고, 예의에 어긋났으며, 행동은 상식의 선을 넘었다. 거사와 함께 주막이나 기생집에도 들어가고 금빛칼과 쇠 지팡이를 가지기도 했고, 혹은 주석서를 써서 화엄경을 강의하기도 하고, 혹은 사당(祠宇)에서 거문고를 타며 즐기고, 혹은 여염집에서 유숙하고, 혹은 산수에서 좌선하는 등 계기를 따라 마음대로 하여 일정한 규범이 없었다"고 적었다.
삼국통일로 '하나가 된 신라'를 보고, 그 평화로웠던 10년을 보낸 뒤 686년 3월 30일 열반에 들었던 그는 서라벌의 강처럼 '역류의 삶을 산 구룡'(丘龍'우리나라를 뜻하는 靑丘의 龍이란 의미)이었다. 제자는 물론 파(派)를 남기지 않았다. 열반 후 유일한 혈육인 아들 설총이 유골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모셨고 손자 중업(仲業)이 할아버지 행적을 비로 남길 때까지 비조차 없었다. 한때 잊혀지기도 했지만 21세기 들어 그의 삶은 '시대의 아이콘'으로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정인열기자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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