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난다] (18)육사 이원록과 여천 이원조

"독립은 너희 세대에 주어진 사명이다" 어머니 말씀 가슴에 새긴 문학

1922년 4월 3일 월요일, 여천 이원조(黎泉 李源朝'1909~1955'이육사의 동생)는 어머니 허길 여사와 같이 대구 수창동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 이가호는 퇴계 이황의 13대손이고 어머니 허길은 의병장 허위의 질녀이며 의병장 허형의 여식이었다. 정통 유가의 학맥과 애국지사의 지조를 이어받은 유서 깊은 가문에서 자라난 이원조는 대구의 명망 높은 지사 이동진 선생(시인 이상화의 조부)이 세운 지사양성소, 우현서루의 맥을 이어받은 당시 대구 수창동에 소재했던 명문 민족사학 교남학교(대륜학교 전신)에 진학하고자 대구로 유학 온 것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서는 원조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긴장감으로 얼굴이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생경한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 허길 여사가 대청마루로 원조를 불러들였다.

"원조야, 대처에서 낯선 학교를 가려고 하니까 조금 떨리느냐? 내가 데려다 줄까?"

어머니는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닙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새로운 환경이니까 조금 설레는 정도입니다. 학교가 바로 옆인데 혼자 갈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열세 살의 원조는 씩씩하게 말했다.

"대구는 안동이나 영천보다 크고 사람도 많은, 큰 도시지만 조금도 겁먹거나 기죽을 필요가 없단다. 너는 퇴계 할아버님의 14대손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조상과 가문의 명예를 항상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외할아버님은 훌륭한 의병장으로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신 분으로 당신의 고귀한 뜻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예, 어머니, 잘 알고 있습니다."

"네가 다닐 교남학교는 명망 있는 우국지사들이 민족 자본으로 세운 명문 사학이란다. 왜놈의 탄압으로 겉모양은 비록 초라하나 심지가 굳은 학교이니 잘 적응하도록 해라. 열심히 배워야 한단다. 배우는 것만이 나라 없는 설움을 극복할 수 있단다. 그래서 뜻있는 지사들이 모여 이 교남학교를 세운 것이란다."

"사실 학교가 너무 초라해서 조금 실망했는데,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사람이나 학교나 외양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어머니,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고 기죽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강해져야 한다. 어떠한 난관이 닥치더라도 결코 울거나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 부당하게 무릎을 꿇지도 마라. 이게 이 어미가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유일한 부탁이자 소망이란다."

어머니는 마치 아버지처럼 엄숙하게 말했다.

비록 돌아가신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에게서 어릴 적부터 쭉 들어왔던 말이었지만 어머니 입에서 이런 종류의 말이 직접 나온 예는 거의 없었던 터라 어머니의 말은 원조에게 색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원조가 교남학교에 다니는 걸 매우 만족해하고 일제의 압박과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쟁쟁한 민족 지사들이 속속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자 영천의 백학학교에 다니던 원조의 둘째 형인 육사 이원록(陸史 李源錄'1904~1944)도 교남학교로 편입하게 되었다. 원록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계획이었으나 원수의 나라로 공부하러 가는 것이 못내 죄스럽고 불안하여 민족정신이라도 한 번 더 철저히 다진다는 의미에서 쟁쟁한 우국지사들이 가르치던 교남학교에 편입하게 된 것이었다.

1924년, 이원록은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머니는 먼 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작은 이해관계에 현혹되지 말고 큰 뜻을 추구해야 한단다. 일신의 영달보다 빼앗긴 나라를 찾는 것이 우선이다. 그전엔 비록 왜놈한테서라도 배울 건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한다. 왜놈들에게 져서는 결코 안 된다. 지금 비록 나라를 빼앗기고 왜놈의 치하에 있긴 하지만 원래 우리 민족은 그렇게 만만한 민족이 아니란다. 우리나라는 언젠가 반드시 독립할 거야. 그게 너희 세대에 주어진 사명이다."

어머니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아 크게 많이 배운 것은 없었지만 구구절절 지당한 말씀만 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은 저명한 철학자의 말보다도 더 믿음이 갔다.

일본에 온 원록은 1923년 9월 1일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조선인 대학살의 진상을 알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일제의 비인간적인 만행과 동포의 비참한 참상을 목격하고 조국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위기감과 절망감으로 고통스러워했을 뿐만 아니라 조국도 없는 자신의 암울한 장래에 대한 극심한 좌절감으로 괴로워했다. 이를 계기로 원록은 마침내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학문보다 행동과 실력으로 일제를 제압하고자 중국으로 건너가 비밀결사인 의열단에 가입하고 독립운동가들과도 본격적으로 접촉하며 모종의 비밀임무도 수행하였다. 중국에 머무는 동안 원록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고 조선군관학교를 졸업하는 등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귀국 후에도, 원록은 대구의 조양회관에서 신문화강좌를 열어 계몽과 민족정기 고양에 힘을 쏟았다. 이때의 청중은 주로 교남학교, 대구고보, 대구농림 등에 다니던 학생들이었다.

그러던 중,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미수 사건이 발생하였다. 칠곡 출신 장진홍은 폭탄 제조 기술을 중국에서 배워와 일제의 고관 암살과 중요시설 파괴를 계획하고, 우선 조선은행 대구지점, 식산은행 대구지점, 경상북도청, 경상북도경찰부 등 네 곳을 공격 목표로 정하였다. 장진홍은 대구 수동에 있던 덕흥여관에 투숙하여 네 개의 폭탄을 제조하고 이를 나무상자에 넣어 잘 포장한 뒤, 여관 종업원 박노선을 시켜 벌꿀단지로 속여 배달하도록 하였다. 박노선은 네 개의 상자를 가지고 가서 우선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하나를 전달했다. 그러나 상자 속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것을 수상히 여긴 포병 중위 출신 일본인 은행원이 재빨리 상자를 열어 도화선을 절단하는 바람에 폭파는 실패하였다. 여관 종업원 박노선이 즉석에서 구속됨에 따라 다른 세 곳에 배달하려고 길 옆에 임시로 놓아두었던 세 개의 폭탄이 연달아 폭발하는 바람에 경찰과 행인 등 여섯 명이 중경상을 입고 은행 유리창이 파괴되었다. 장진홍은 동지들의 집에 은신하면서 다시 거사를 시도하려 했지만 실행하지는 못했다.

범인 검거에 쫓긴 경찰은 평소 미운 털이 박힌 이원록 등 비밀결사대원 항일 인사 여덟 명을 체포하였다. 그 가운데 이원기, 이원유, 이원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느 날, 이원록이 취조실로 끌려 들어갔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나?"

빼쪼롬한 한국인 형사가 물었다.

"……"

"묵비권을 행사해도 소용없어. 벌써 이원기가 다 불었거든. 넌 그냥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거야."

원록이 취조를 거부하자 형사는 대본을 쓰는 작가처럼 질문서의 공란을 메워 넣었다.

"길 옆에서 폭파한 폭탄 세 점은 어디로 배달하려 한 거야?"

정형적인 질문을 던지곤 스스로 답안을 채워 넣는 그의 모습은 연극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왜놈과 그 앞잡이들 집으로 보내 지옥 구경을 시켜주려고 했지. 당신 집으로도 하나 보내줄까?"

원록이 입을 실룩거리며 빈정거렸다.

"뭐야?"

열 받은 형사는 앉은 자리에서 오른 손으로 원록의 뺨을 후려쳤다.

"이 불쌍한 인간아, 왜놈 앞잡이가 되어서 죄 없는 동포를 잡아들여 죄를 뒤집어 씌우고 또 고문을 하는 것이 네 조상과 처자식들에게 부끄럽지도 않나? 그렇게 할 짓이 없더냐? 네 인생이 불쌍하다."

원록의 원색적 비난에 뚜껑이 열린 형사는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머리를 마구 때리고 발로 '촛대 뼈'를 마구 까며 우는 듯 쥐어짜는 듯한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이 ○새끼야, 넌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았잖아? 근데 우리 같은 쌍놈한테 너희 양반 놈들이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지랄이야? 이 ○○놈아, 그렇게 잘 났으면 나라나 뺏기지 말든지. 우리 쌍놈이 못나서 나라를 뺏겼나, 아니면 너희 양반 놈이 못나서 나라를 뺏겼나? 이 잘난 ○새끼야, 대답 좀 해 봐라. 누군 이 짓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나?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그 잘난 입으로 제발 말 좀 해봐라?"

형사는 기어코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원록도 눈물이 쭉 나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눈물을 보이지 말라고 버릇처럼 말씀하셨지만 순식간에 예고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방법은 도저히 없었다.

"당신이 퇴계의 후손이라고 하니 나도 그냥 내보내주고 싶어. 그렇지만 우리 입장도 있다고. 누군가 희생해야만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편해질 수 있단 말이야. 당신은 희생타라고. 희생타가 없어야겠지만 누군가 희생타가 되어야 한다면 그래도 당신 같은 지도층 인사가 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나?"

"내가 모든 사건 전모를 자백하겠소. 이번 폭파 사건은 모두 다 나 혼자 계획하고 실행한 것이니 다른 사람은 죄가 없소. 폭탄 제조부터 포장까지 모두 다 내가 했소. 중국 상하이에서 폭탄 제조 기술을 배웠소. 폭탄을 배달한 사람도 아무 것도 모르고 전달한 것뿐이니 죄가 없소. 그러니 나 혼자만 기소하고 다른 사람들은 무고하니 모두 다 석방해 주시오. 그러면 당신들 원하는 대로 재판에 최대한 협조하겠소."

원록은 혼자 한 것으로 자백했으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기가 한 것으로 시인한 바람에 여덟 명 모두 유죄 선고를 받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원기는 고문 후유증으로 불구가 되었고, 이원록은 수인번호 264를 딴 육사(陸史)를 필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육사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미수 사건으로 1928년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것을 필두로 베이징감옥에서 광복을 불과 한 해 앞둔 1944년 옥사할 때까지 무려 17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육사는 온건한 선비보다는 행동하는 시인이었고, 시인이기에 앞서 불꽃같은 의지를 지닌 혁명투사였다. 조국이 있고 민족이 있고 난 다음에야 문학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육사의 한결같은 신념이었다.

1928년 2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동생 집을 거점으로 후일을 도모하고 있던 장진홍은 1929년 2월 14일에 일본 헌병대 앞잡이의 밀고로 경북 경찰부 소속 한국인 경찰에 의해 체포됨으로써 육사를 비롯한 여덟 명의 무고한 항일 지사는 모두 석방되었다. 장진홍은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복역 중, 왜놈에 의해 죽임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며 1930년 6월 5일 36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진홍 사건에 이어 1929년 10월 광주학생의거가 일어나자 육사는 또다시 예비 검속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는 등 대구는 육사에게 민족혼을 불어넣어준 모태였을 뿐만 아니라 수난처였고 저항의 불길을 더욱 타오르게 한 투쟁지였다.

'청포도' '광야' '절정' 등의 민족혼이 담겨있는 웅혼한 시를 쓴 육사는 정상적인 문학 수업이나 시작 수업을 받은 주류 시인이 아니고 행동과 경험에서 시상을 얻어 타고난 시적 재능으로 빼어난 민족주의 시를 생산한 독특한 시인이었지만, 육사를 빼놓는다면 우리나라의 근대 시사가 허전해질 정도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80년 신문학사를 통해 육사를 능가하는 그 어떤 혁명시인도 갖지 못한다. '민족이 존재하는 한 종말이 없다'는 금언은 육사가 신봉하는 절대의지요, 신앙이었다.

매운 계절(季節)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시 '절정')

한편, 육사의 동생인 여천 이원조는 1926년 대구 교남학교 중등과를 졸업하고 위당 정인보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여천은 위당이 '장안삼재(長安三才)'의 한 사람으로 꼽을 정도로 총명하고 재기발랄하였다. 여천은 일본 도쿄의 법정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당시 왕족이었던 학부대신 이재곤의 손녀와 조병옥 박사의 주례로 결혼을 하였는데, 당시 국혼으로 치러졌던 여천의 결혼식은 한양의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여천 이원조는 시와 소설로 데뷔하였으나 100여 편의 주옥같은 평론을 생산함으로써 우리나라 현대 평론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대구에서 자란 육사와 여천, 두 형제 문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육사'여천형제문학비가 2003년 10월에 그들의 모교인 대륜학교 교정에 세워졌다.

오철환(소설가'대구광역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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