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중·고교 시험이 급변하고 있다. 대구시교육청이 올해부터 교내 시험에 '서술형 평가' 방식을 전격 도입해 학교 현장이 술렁이고 있다. 현재 중간고사를 치르거나 앞두고 있는 학교마다 새로운 평가 방식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학생들은 낯선 평가 방식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교사들은 문제 출제와 채점에 대해 난감해하는 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교육계에서는 서술형 평가 방식 확대가 사고력과 창의력을 키우는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선 방법과 시기 등 실제 적용에 있어서 의견이 분분하다. 실제 중'고교에서는 서술형 문제가 어떻게 출제되고 있는지, 또 학생, 교사들의 반응은 어떤지 짚어봤다.
◆학생, 교사 모두에게 낯선 시험
"갑자기 서술형 문제를 낸다니 당황스럽더라고요. 답을 적긴 적었는데 몇 점이나 나올지 불안해요."
A여중에서 전교 1, 2위를 다투는 이모(3학년) 양은 지난주 중간고사 시험지를 받아보곤 진땀을 흘려야 했다. 객관식 문제는 평소처럼 술술 풀었지만 서술형 문제 앞에선 한참을 고민했다. 평소 기초를 잘 다진 편이라 서술형 문제에 답을 빼곡히 적었으나, 몇 점이나 나올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했다.
이 양의 사회 시험지 하단에는 '정책 결정에 시민이 참여하는 방법에 대해 써보시오' 등 서술형 문제 2개가 출제돼 있었다. 제대로 답을 적었다고 생각했지만, 이 양은 문제와 답을 살펴본 학원 강사의 지적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인 참여 방법으로 일단 선거, 투표에 대해 서술하긴 했지만 의외의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교과서에는 '시민단체'라고 적고 있는데 '정당'이라고 써버렸어요. 아는 내용인데 단답형이 아니라 문장으로 적다 보니 착각한 것 같아요. 1점으로 전교 등수가 10여 등씩 오르락내리락하는데 너무 아쉬워요."
서술형 평가 문항이 포함된 중간고사를 치른 B고 학생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평소 공부라면 자신있다고 생각한 김모(2학년) 군 역시 경제 과목의 서술형 문제 2개를 보고는 잠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점적 경쟁시장이 완전경쟁시장과 다른 특징에 대해 서술하시오', '시장경제체제의 역기능에 대해 서술하시오' 등 대학에서나 볼 법한 문제가 출제된 것.
"몇 자 이내로 쓰라는 조건이 없어 당황했어요. 아는 걸 차곡차곡 적고 문장으로 연결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데 어느 정도 분량으로 써야 좋은 점수를 받을지 감이 안 잡히더군요. 자꾸만 '너무 짧게 쓴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어요."
중간고사를 모두 치른 C고의 이모(1학년) 양은 아쉬움이 크다. 시험 후 교사가 제시한 답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데 막상 시험에서는 서술형 문제에 대한 답을 제대로 적지 못했다는 것. "서술형 문제가 나온다는 부담 때문인지 뭐라 써야 할지 막막해지더군요. 아는 개념 몇 개를 한 문장으로 연결하기만 하면 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서술형 평가 방식이 이번 학기부터 도입되면서 난감한 것은 학생만이 아니다. 대구시교육청이 올해부터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등 5과목 한 학기 총점을 기준으로 20%씩 서술형 평가 결과를 포함키로 함에 따라 처음 서술형 문제를 출제하게 된 교사들도 고민에 빠졌다.
한 달여 동안 담당 과목 교사들이 매달린 끝에 중간고사 문제를 완성한 학교도 여러 곳이다. 아직 서술형 문제로 시험을 치러본 적이 없는 학생들을 상대로 어떻게 문제를 만들어낼 지부터 채점 시 정확성과 공정성까지 염두에 둬야 하니 힘겨울 수밖에 없는 상황.
D고 사회과 교사는 "생각이 다를 수 있어 사회적으로 논쟁거리가 되는 주제는 피하고 일정 점수는 나와야 하니 난이도도 조정하는 등 고려해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애를 먹었다"고 했다. E고 한 교사는 "일단 첫 시도이니 만큼 무리하지 않고 교과서에 나온 기본 개념을 간단히 풀어 쓰라는 식으로 출제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며 "각 교사마다 채점 기준표를 들고 점수를 매기지만 교차 확인하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어 채점 부담도 커지게 됐다"고 전했다.
◆서술형 평가, 변해야 벽을 넘는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최근 2013년까지 전국 초'중'고교 시험 서술형 문제를 40%까지 늘리겠다고 밝히면서 서술형 평가 방식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서술형 평가가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고, 창의력과 논리적 사고력을 키우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라는 판단에서다.
이 때문에 학생과 교사 모두 공부방식과 수업기술에서 변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객관식 문항을 푸는 데 익숙한 학생들은 단순 암기 위주의 공부 습관을 바꾸지 않는다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학교 현장에서는 교사 개개인의 노력에 더해 관련 연구에 대한 지원이 뒤따라야 서술형 평가 방식이 조기에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교사들이 새 평가 방식 도입으로 불안해하는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기술을 익히는 데 애쓰기보다 기본으로 돌아가라"다. 가령 수학은 문제 풀이 과정을 충실히 학습하고 과학은 일상 생활 속 현상들을 교과서에서 배운 과학 원리와 연결짓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
다른 과목도 마찬가지다. 상인고 서재용(사회) 교사는 "약술 형식을 취할 것으로 보이는 경북대 대학진학적성검사(AAT) 등 입시에 대비하려면 학교 시험을 통해 글쓰기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며 "신문 구독이나 독서를 통해 사회 현상에 관심을 갖고 교과 내용과 연결지어 보면 시험을 치를 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경명여고 한준희(국어) 교사는 글로 주장을 내세울 때 그에 맞는 근거를 함께 밝히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문학의 경우만 해도 한 작품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순 없는지, 왜 그런 시각으로 바라봤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평소에 연습을 해두길 바란다"고 했다.
정화여고 이인우(영어) 교사는 기본적인 의사소통 표현과 교과서에서 나오는 여러 표현을 눈여겨보고 쓰기 연습에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전했다. 이 교사는 "영어 서술형 문제를 풀 때는 시제, 인칭, 수의 일치 등 기본 문법 영역에서 실수가 나오지 않도록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교사들 사이에서는 서술형 평가 방식의 안착을 위해 시교육청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한 고교 교사는 "시행 취지에는 동감하지만 시교육청 차원에서 서술형 문제를 미리 개발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새 방식을 적용하니 교사들이 더욱 힘겨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교사는 "이제부터라도 문제 개발을 위해 관련 교사들을 상대로 한 지속적 연수가 필수"라며 "평가 문항 개발 후 각 학교가 공유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시교육청은 서술형 평가가 대세로 굳어지고 있어 시행 시기를 더 늦추기 어려웠다는 입장이다. 시교육청 한 관계자는 "서울 등 지난해 서술형 평가를 시작한 지역 교육청과 교과부의 예시 문항 자료집을 안내했다"며 "올 상반기 중 대구시교육과학연구원에서 별도의 예시 문항 매뉴얼을 만들어 각 학교에 추가 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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