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어린이날

'우리들의 희망은 오직 한 가지 어린이를 잘 키우는 데 있을 뿐입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내 아들놈, 내 딸년같이 자기의 물건같이 알지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새 인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굴리려 하지 말고 반드시 어린이의 뜻을 존중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1923년 5월 1일 첫 어린이날 기념식을 하며 배포한 전단에 실린 '어린이날의 약속'에 실린 글 일부이다. 소파는 한 해 전인 1922년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1923년 3월에는 우리나라 첫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또 아이를 어른과 같은 하나의 인격체로 보아 어린이라는 낱말을 처음 만들기도 했다.

아이를 부모의 부속물 정도로 여기던 사회 분위기와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함이 맞물렸던 당시, 어린이에 대한 소파의 생각은 파격적이었다. 소파는 이 '어린이날의 약속'과 함께 어린이날 선언 3대 조건을 내세웠다. 어린이를 과거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해 인격적 대우를 할 것, 경제적 압박에서 해방해 14세 이하는 무상으로 노동을 시키지 말 것, 어린이가 배우고 놀 수 있는 사회적 시설을 만들 것을 주장했다. 현재에 그대로 옮겨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때로부터 100년 가깝게 흐른 지금, 어린이 존중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그대로다. 외형적으로는 온갖 법으로 어린이를 보호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더 악화했다. 집안에서는 가정 폭력에 시달리고 바깥에서는 손쉬운 범죄의 대상이 된다. 2009년 전국 45개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신고된 9천309건의 아동 학대 상담 건수 중 87.2%가 가정 폭력이었다.

내일은 89회 어린이날이다. 청와대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행사를 치른다. 폭력과 범죄의 대상으로 시달리고, 학교에서 학원으로 내몰리며 자신의 꿈을 키울 여유가 없는 어린이에게 이날 하루만큼은 뭐든 마음껏 할 수 있는 '꿈의 날'인 셈이다. 소파가 어린이날을 만들며 택한 구호는 '항상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자'였다. 어린이를 잘 키우는 일이 곧 식민지라는 최악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어른과 어린이에게 동시에 호소한 것이다. 10년 뒤 우리의 어린이가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해 보자. 지금 어떻게 키워야 할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정지화 논설위원 akfmcp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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