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대숲 밭에는 찬 눈이 내리고 있었다. 죽농(竹農)이 대가 성긴 공간으로 들어서자 석재(石齋) 선생의 음성이 들려왔다. "말을 달릴 수 있도록 공간을 넓혀라." 죽농이 공간을 넓혀 획을 치니 그 사이로 바람이 일었다. "바람이 통하지 못하도록 먹을 무겁게 하여라."그 옆으로 다시 획을 빽빽이 치니 눈송이가 흩어졌다. 그러자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둘을 이어 뜻을 넉넉게 하여라." 죽농은 항시 듣던 그 말이 무엇인지 순간 의아스러워 입을 떼려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병이 깊어진 것인가? 죽농은 아득해지는 스승의 음성을 잡으려 애쓰며 목구멍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질문으로 가슴을 쳤다. 찬 눈이 내리던 대숲에 순식간에 어둠으로 내렸고, 희뿌연 여명이 조용히 비춰 왔다.
잠에서 깬 죽농의 콧속으로 지린 쉰내가 풍겨왔다. 며칠 거동을 하지 못한 몸이 풍기는 쉰내 속에서, 꿈속의 묵향이 코끝에 살아나 제 몸이 스스로 부끄러웠다. '너무 오래 산 때문이다.' 그리곤 몸을 간신히 일으켜 굳어져 가는 몸뚱이에 저고리를 입히고 종이를 폈다. 잎이 무성하고 힘차던 대나무의 줄기는 죽농의 병이 깊어 갈수록 메마르고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거칠고 깔깔한 대 한 줄에는 두세 개의 이파리만이 붙어 있게 되었다.
그를 서화의 길로 열어 준 석재 서병오 선생은 붓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라는 뜻의 죽농(竹農)이라는 아호를 19세이던 그에게 내려주었었다. 그 아호의 農처럼 젊어서부터 죽먹과 함께 하기에 힘썼고, 나이가 들어서는 스스로 대나무가 되겠다는 뜻으로 아호를 스스로 儂이라 고쳤으니,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竹農과 竹儂의 시대로 구분하였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지금 스스로 대가 되겠노라던 儂의 그 뜻이 편치 않음은 무엇일까?
생을 걸어 단 한 번 꽃을 피우고 죽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신이 일생 매달렸던 죽(竹)이 아니었던가? 벌레 한 마리 키우지 않으려 애쓴 한 몸속에는 이제 벌레가 무리지어 집을 지었으니, 이제 낫으로 온몸이 잘려도 마땅할 일이건만, 아직도 억척스럽게 붙어 떠나지 못하는 이 미망(迷妄)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직 몸 안에 갇혀 있는 이 갑갑한 것은 무어란 말인가?
죽농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종이를 걷으려는 찰나, 문밖에 기척이 나더니 나직이 무릎을 꿇는 그림자가 보였다.
"창이 들어 오너라."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창이 바닥에 펼쳐진 종이를 보자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언제부터 깨셔서…. 지금은 붓을 드셔서는 아니됩니다."
죽농은 창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어제 나간 일은 어찌 되었느냐."
"회유하고 달래기를 여러 번, 스승님의 뜻이 완고하다니 결국 내어 주었습니다."
대답을 마친 창이 들고 온 서화를 펼치자, 죽농 자신의 십여 년 전 작품인 석죽이 나왔다. 먹물이 많고 부드러운 굵은 획으로 그려진 글자 위에 철선과 같은 가는 획들이 어우러진 모습이 자유로우며 필세가 튼튼하였다. 하지만 그림을 바라보는 죽농의 눈가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하였다.
"대를 그리는 것은 글씨를 쓰는 것과 같으니, 대를 배우면 문득 글씨를 쓸 줄 알게 된다. 대는 서법에서 오는 것이니 글씨에 능하지 못한 사람이 대를 잘 그릴 수는 없다. 내 일찍이 스스로 대가 되겠노라 칭하던 때 썼던 글씨이건만 오직 손끝으로만 연마하며 오묘한 경지를 시늉만 하고 있었으니 고상한 견지를 찾을 수가 없구나."
죽농은 병이 깊어진 어느 날부터 무슨 연유인지 세간에 흩어져 있던 자신의 서화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더러는 자신의 다른 그림과 맞바꾸어 거두기도 했고, 사람을 시켜 돈을 주어 사들이기도 했는데, 죽농의 병이 깊어졌다는 소식과 함께 자신의 서화를 거두어 모은다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은 그림을 더욱 내놓지 않으려 하여 때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렇게 모아들인 서화들과 보관하던 서화들을 합치자 700여 장이 넘는 작품들이 벽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죽농은 그 서화들을 한쪽에 놓은 뒤, 창에게 하나하나 펼쳐놓기를 일렀다.
창이 펼친 첫 번째 그림은 그가 사십 세 살 즈음 그린 묵죽(墨竹)이었다. 침착한 운필감 속에 대담함이 엿보이고 한마디씩 그렸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높은 필격을 담고 있었다.
"마디와 마디가 단절되어 있되 뜻이 연결되어 있어야 함인데, 뜻을 형용하지 못하였으니 기백이 없고 천하기가 쑥대 같구나." 죽농은 그리 말하며 작품을 자신의 옆에 물렸다.
두 번째 그림은 난초였다. 난엽은 강건한 필획의 전서 필법을 사용하여 힘찼고, 급격히 꺾이는 잎사귀에 유연함이 어울려 호방하였다. 괴석은 서병오의 운필법을 따른 것으로 거침이 없었다.
"난은 그림 그리는 법칙대로 하는 것을 가장 꺼리는 것이다. 만일 그림 그리는 법칙을 난 치는 법에 쓰려면 일필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추사께서 난화로 특히 소문난 사람이 없다고 했거늘, 잎이 힘을 형용하지 못하였고, 괴석의 갈필이 소란하여 깊이가 없구나."
스승의 평이 이어지자 창의 마음 한편에 불길하고도 불안한 기운이 엄습하였지만, 스승의 마음을 물을 수가 없었다.
"스승님, 듣고 있기 죄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죽농은 창에게 다음 그림을 내놓으라는 손짓으로 그 물음에 대신했다.
"매화를 그리는데 비결은 먼저 뜻을 세워야 함이라 했다. 붓놀림이 신속하여 미친 듯해야 하고, 손은 번개와 같아서 손을 멈추고 머뭇대는 일이 있어서는 못쓴다. 대개 서화가 마음에 만족하게 되는 것은 작정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니 천작(天作)으로 피어야지 인위적으로 되어진 것은 못쓴다 하였느니, 먹을 쓰고 붓을 쓰는데 귀함은 신기(神氣)가 오는 데에 있는 것을, 인위적인 재기로 천작을 탐하였으니 향기가 꽃 속에 갇히었구나."
죽농이 그렇게 자신의 그림에 하나하나 자평을 해 나가는데 어느덧 해가 중천을 넘었다. 죽농이 창과 마주앉아 그림을 분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제자들과 서화인들이 마당으로 몰려들었다. 그림 한 장 한 장을 평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엄숙하고 차가운지, 사람들은 죽농의 그림 한 장이 넘어갈 때에야 생각난 듯 조심스레 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결국 밤이 깊어 분류가 끝나자 죽농의 등 뒤에는 쉰 장의 종이만 남았고, 나머지 육백 장이 넘는 그림이 죽농의 옆에 가득 쌓였다. 평을 마친 죽농이 쌓인 것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이것들을 마당에 내어 태워라."
"스승님…!"
"태워라. 작품이란 종이의 상태에 따라 수백 년도 보존되는 터, 나는 지금까지 법이 아닌 것을 법처럼 말하고, 도가 아닌 것들을 도인 양 행하고 다녔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것들이 다 착각이었고 속임수였다. 지금까지 남의 손에 들어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것이라도 정리하여 후세에 남부끄럽지 않은 것만 남기도록 하여라."
죽농의 목소리는 낮고 엄격했다. 창은 그 조용한 말투에 무서움을 느꼈다. 창이 종이를 거두어 마당으로 나가자 사람들이 만류하며 소리가 이어졌다. 사람들 틈에 어찌할 바 모르는 창을 보며 죽농은 다시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 말하여 피곤하구나. 태우고 어서 물러가거라."
창이 떨리는 손으로 종이에 불을 붙이자 죽농은 그제야 방문을 닫았다. 연기 타는 냄새가 조용히 방으로 스며들었고, 밖에서 들리는 탄식과 흐느낌 속에서 죽농의 피로는 깊고 아득했다.
-불이 나를 가지런히 하려는가. 죽농은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인지 혼절인지 모를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찬 눈이 걷힌 오월의 검은 대숲 밭에 연기 타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연기 서린 죽향이 죽농의 허파 속으로 젖어들었다. 연기 타는 냄새에 대숲이 제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이 들어왔다. 죽농은 자신도 모르게 으으으 신음을 질렀다. "스승님! 스승님!" 귓가에 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의 목소리 위로, 매캐한 종이 타는 냄새 위로, 어둠 속에서 깨알같이 돋아나는 흰 빛이 보였다. 그 흰 빛 아래서 대숲이 맹렬히 몸을 떨었고, 까마귀와 작은 새떼들이 숲으로 날아들었다.
그때 죽농의 눈 안으로 대나무 가지 끝에서 와글대며 피어오르는 허연 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어디인가. 이 무슨 빛이며, 이 무슨 소리인가. 드디어 내가 죽은 것인가?
잠인지 죽음인지 모를 고요한 세계 속으로 어디에서 깃드는지 알 수 없는 시간만이 부딪히고 달려들었다가 다시 흩어졌다. 허옇게 머리를 늘어뜨린 꽃씨를 물고 검은 새떼들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아득히 먼 땅으로. 아득히 다른 세상으로.
1978년 오월 새벽, 하늘은 유순한 빛으로 가득 찼고, 별들이 맑았다.
◆죽농 서동균은? 석재 문하의 근대 서화가
죽농(竹農, 竹儂) 서동균(1902~1978)은 일제 강점기, 8'15 해방 그리고 6'25 전쟁으로 이어지는 민족 수난기 속에서 활동했던 근대 서화가이다. 대구시 향촌동에서 서기석(徐基奭)의 독자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가학(家學)으로 한문과 서예를 접한 죽농은 석재 서병오(徐丙五)를 통해 예술 세계의 골격을 세웠다. 1920년 서병오의 문하에 들어간 그는 서병오로부터 '붓으로 농사를 지어라'는 뜻의 죽농(竹農)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죽농이 34세 되던 때 서병오는 임종 전 죽농에게 "내가 죽은 뒤의 관 위의 명정(銘旌)은 네가 쓰라"는 유언을 남김으로 그의 적통을 이은 후계자로 인정한다.
만년에 호를 석재가 내려준 竹農에서 내가 스스로 대나무가 되겠다는 의미의 竹儂으로 바꾼다. 스승 서병오가 운영하던 교남서화회(嶠南書畵會)를 물려받아 후에 영남서화원(嶺南書畵院)으로 이름을 바꾸어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영남지역 서예가들의 모임인 해동서화회(海東書畵會)를 창립하였다. 74세 때 (1975) 서예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문화훈장을 수상하였고, 그 해 재야작가로는 처음으로 국전 초대작가로 추대되면서 심사위원에도 위촉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람을 보내 그의 그림을 청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그는, 임종 전 평생토록 모아둔 작품 650여 점을 소각한 뒤 그 해 1978년 5월 25일 7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김계희 (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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