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새로운 정관 관계의 정립

국정운영에서 정치와 행정 간의 관계에 관한 다양한 가치 기준들이 있다. 예로서, 미국에서는 선출직 대통령과 임명직 행정관료 간의 관계, 즉 정관 관계(政官關係)를 설정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가치 기준을 적용해 왔다.

첫째, 대통령은 '민주적 대응성'이라는 가치를 구현해야 한다. 자신을 국정의 책임자로 선택한 국민들의 선호를 파악하여 그것을 국정에 반영해야 한다는 가치 기준이다. 둘째, 행정관료들은 국정운영에서 '중립적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대통령이 제시하는 정책을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추진하기 위해 필요한 전문적 지식과 경륜을 갖추고, 그에 입각하여 사심 없이 행정을 수행해야 한다는 가치 기준이다. 셋째, 대통령은 행정관료들에 대해 '행정적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국민의 선호를 반영하여 정책을 추진하려면 직업 관료들을 효과적으로 통솔하고 독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치 기준이다.

미국인들은 18세기 말 건국 이후부터 국정운영에서 민주적 대응성을 가장 우선시했다. 그 후 약 한 세기가 지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개혁주의 시대'에 당시 유럽 국가들에 비해 크게 뒤처졌던 행정의 중립적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세기 초중반에 이르러서부터는 대통령의 행정적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을 시도해 왔다. 시대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현상이 나타나면 그것을 바로 잡아 균형을 기하려고 애써 온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60여 년 동안에 전개된 정관 관계를 이 세 가지 가치 기준을 적용하여 분석해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의미 있는 부침(浮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이승만 정부 시대에 대통령의 민주적 대응성과 행정관료제의 중립적 능력은 모두 낮은 수준이었다. 많은 논란과 명분에도 불구하고 일제 관료 출신들을 재등용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서 당시에 심각했던 인재난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특유의 카리스마와 경륜을 바탕으로 높은 수준의 행정적 리더십을 (적어도 임기 중반까지는) 발휘했다. 1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실험에 그쳤던 윤보선-장면의 내각책임제 정부는 민주적 대응성에 있어서는 그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가장 높았다고 본다. 그러나 행정의 중립적 능력이나 행정수반의 행정적 리더십은 극도로 취약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휘하에 있는 군 조직에게 정권을 이양해야만 했던 것이 이를 입증한다.

박정희 정부에서 전두환 정부에 이르는 시기에 민주적 대응성은 (특히 '유신' 이후부터는) 매우 낮았다. 반면에, 행정적 리더십은 매우 높았으며, 행정의 능력 또한 크게 향상되었다. 한국에서 실적주의와 직업공무원제가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1987년의 민주주의 이행 이후 등장했던 역대 정부에서 민주적 대응성은 크게 신장되었다. 전문적인 교육훈련 기회와 국정경험이 쌓이면서 행정관료들의 중립적 능력 또한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행정관료제에 대한 행정적 지도력은 그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행정관료제에 대한 대통령의 통솔력을 약화시키고 있는 주요 원인으로 양자 간에 쌓여 가고있는 상호불신을 빼놓을 수 없다. 민주주의 이행 이후 정확하게 5년마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과거 시절에 대통령과 행정관료제 간에 형성되던 '특별한 연대(nexus)'가 점차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대통령과 관료제 간의 끈끈한 연대가 해체되고 있는 현상은 일면 민주주의 국가에 걸맞은 정관 관계의 정상화 과정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과거에 대통령들은 정당성이 취약해질수록 관료제와의 긴밀한 연대를 통해 충성심을 확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 같은 권력 연합이 가능하려면 양자 간에 뭔가 집단적인 이익 공유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대통령과 행정관료제 간에 적절한 수준에서 상호 견제가 이루어지는 것도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과히 해로운 것 만은 아니다. 국정운영에서 대통령의 민주성 여부와 관료제의 중립성 여부를 모두 걸러내는 제어 장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적 정당성을 지닌 대통령이 효과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려면 어떻게 해서든 행정적 리더십을 확보해야만 한다. 집단 이익이 아니라 공공 이익을 중심으로 의기투합하는 새로운 정관 관계의 형성이 후기 민주주의 시대 한국인들의 과제가 되고 있다.

정용덕(서울대 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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