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그래 괜찮아

밤 10시쯤이라고 기억한다. 지인에게 전화가 걸려와 통화하고 있는데 주방에서 갑자기 와장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 엄마는 이때쯤 시간이 난다며 동네 목욕탕으로 바구니를 꾸려 나간 뒤였다. 초교 6학년 큰 녀석은 "무슨 소리야"라며 건넌방에서 소리쳤다. 순간 우리 집 사고뭉치인 초교 1학년 작은 녀석이 잠에서 깨어 무슨 사고(?)를 친 모양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전화를 끊을 새도 없이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가 보니 제 키보다 높은 전자레인지에서 접시가 떨어져 파편이 아이의 발을 위협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고 다급하게 소리질렀는데 그 소리에 아이는 한 번 더 놀란 모양이다. 벌써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움찔움찔 발을 움직였다. 가까스로 아이를 안전지대로 옮겼다. 그 녀석을 눕히고 발바닥을 보니 작은 조각 하나가 벌써 박혀 있었다. 조심스레 빼내고 구급약으로 마무리했다. 아이의 입에선 "엄마에게 말해야 될 거야"라며 울음이 새어나왔다. 다치지 않게 하려고 소리친 것이 미안했던 나는 "그래 괜찮아"라며 아이를 꼭 안아줬다. 매일 하는 포옹이지만 흐느끼는 아이는 더 측은해 보였다. 다음부터 꼭 조심하라는 한마디를 하며 그 녀석을 재웠다. 하지만 방문을 닫아도 그 녀석의 울음이 자그마하게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그 녀석 참…'하며 청소도구를 들고 주방을 정리했다.

며칠이 지났다. 엄마에게는 한 장, 아빠에게는 두 장의 무언가를 그 녀석이 내밀었다. "이게 뭐냐"는 물음과 함께 열어본 아빠는 그야말로 '빵' 터졌다. '효도 쿠폰'이었던 것이다. 부모가 이 쿠폰에 적힌 무언가를 적힌 기간 안에 그 녀석에게 사용할 수 있는 바로 그 '쿠폰'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바로 그 쿠폰을 소비했다. 안마를 주문했던 것이다. 아빠의 쿠폰 한 장은 구두를 닦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쿠폰에는 내용과 기간이 없었던 것이었다. 왜 아무것도 안 적었느냐고 물었더니 그 이름도 엄청난 '백지 쿠폰'이라는 것이다. 기간도 내용도 없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엄마와 아빠 둘 다 '빵' 터졌다. 그 녀석은 그날 밤 그 사고에 대해 "아빠의 행동이 진짜 좋았다"라고 표현했다. 방에 데려다 준 아빠가 정말 고마워 방에서 울었다는 것이다. '이 세상 아빠 누구도 그리하였을 터인데 녀석 참 기특하구나.'

되돌아보면 그날 밤. "왜 깨트렸어, 이 녀석아"하며 야단부터 쳤다면 무서워 떨던 아이는 발바닥에 박힌 날카로운 유리조각보다 더 마음이 아플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괜찮아"하며 아이를 달래고 사랑으로 품은 효과를 본 것이다. 초교 1학년이 그런 아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마냥 흐뭇하기만 하다. 그런 녀석이 발행한 이 '백지 쿠폰'은 아까워 도저히 사용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뭘 해달라고 할까'라는 고민도 없다. 마치 행복의 부적처럼 가지고 다녀야겠다.

이완기<대구시립극단 제작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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