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이 북으로 굽이치고, 알운산 자락 구인봉과 청량산이 내려다보고 있는 양촌(兩村)에 백로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600년 풍상을 딛고 움을 틔운 회화나무 한 그루와 소나무 세 그루가 입향조인 삼수정(三樹亭)을 보듬고, 두 마을을 지키고 있다.
삼수정의 후손, 동래 정씨들이 뿌리내리고 있는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 우망과 청곡리 별실마을. 청룡산을 가운데 두고 한 핏줄과 추억으로 얽힌 마을이다.
용궁현 구담리에서 태어난 삼수정 정귀령이 1424년 충남 홍성군 결성현감을 지내고 이듬해 자리 잡은 곳이 바로 별실이다. 정귀령은 별실 뒷동산에 삼수정을 짓고 뿌리를 내렸으며, 그의 동래 정씨 후손들은 별실과 우망에서 낙동강을 젖줄로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100여 가구가 있는 우망은 영모재에서, 60여 가구가 있는 별실은 별묘에서 해마다 조상에 대한 제를 올리고 있다.
삼수정의 19대손인 정재원(82) 씨는 "삼수정은 비록 1년가량 결성현감을 지냈지만 워낙 선정을 베풀어 지금도 홍성군 결성면민들은 당시 삼수정이 결성관아에 심은 회화나무 앞에서 매년 단옷날 그분을 기리며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청룡산과 백로
우망과 별실 중간의 청룡산(靑龍山)은 산이라기보다는 야트막한 언덕에 가깝다. 소나무가 우거진 숲과 인근 낙동강 습지로 인해 예부터 백로와 왜가리 수백 마리, 많게는 수천 마리의 쉼터이다. 지금도 청룡산 소나무 꼭대기 곳곳에는 백로와 왜가리가 둥지를 틀고 있어 한 폭의 그림이다.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앞다퉈 풍경을 담는 곳이기도 하다.
상당수 주민들은 이 새들을 '황새'로 부르고 있다. 그러면서 옛날 '황새 알'(백로 알)의 추억을 얘기했다.
이남호(88'여) 씨는 "저 새알 있잖아, 황새 알 그거 삶아놓으면 맛있더라고. 나중에 배고픈 사람들은 먹어요. 내가 아팠을 적에도 황새 알을 얼마나 먹었는지 모른다. 매일 소나무 꼭대기 올라가 집에 가져오고. 계란보다 굵어여, 더 커요"라고 말했다.
정우영(47) 씨도 "4월 20일경 알을 낳는다. 지금은 (낙동강) 공사를 해가지고 시끄러우니까 많이 떠났다"고 했다.
주민들은 백로가 주로 4월 중순부터 5월 사이 둥지에 알을 많이 낳고, 계란보다 더 큰 알은 '어지럼증'에 효과가 있다고 주워 먹곤 했다고 말했다.
특히 하얀 백로 떼는 청룡산 솔숲에 둥지를 틀고 낙동강변에서 쉽게 먹이를 구하며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이어왔지만 이제 보금자리를 위협받게 됐다. 강 준설과 농지 리모델링으로 청룡산이 포위돼 새의보금자리를 둘러싼 강변 상당 부분이 깎여나갔기 때문이다.
◆청룡과 백호
우망 동쪽과 남쪽에 있는 청룡산과 알뫼. 청룡이 승천하기 전 누워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청룡산이고, 둥그런 알 모양으로 생겼다고 알뫼다. 두 산 앞에는 예부터 비석이 하나씩 세워져 있었다. 주민들은 청룡산 앞 돌을 좌 '청룡', 알뫼 앞 돌을 우 '백호'로 부르며 신으로 모셨다. '할매동신' '할배동신'으로 부르기도 했다. 별실 앞에도 동제를 지내는 '동신(洞神) 돌'이 있었다.
우망과 별실은 1400년대 초반 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줄곧 마을제사(洞祭)를 지내왔다. 하지만 주민들이 신으로 모시는 이 돌들이 훼손되면서 이제 동제는 사라졌다.
우망의 동제는 1996년 잠시 끊겼다. 마을 농경지정리 과정에서 청룡을 상징하는 입석이 소멸된 것이다. 이후 2년 동안 동제를 지내지 않은 주민들은 1998년 다시 새 돌을 구해 지금까지 동제를 지내왔다. 하지만 올해 정월 대보름날 오전, 마지막 동제를 지내야만 했다. 청룡을 상징하는 입석을 또다시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낙동강 사업 시공업체가 강 준설과 농지 리모델링 과정에서 훼손했거나 파손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연이(76'여) 씨는 "올게(올해) 한 사람이 포크레인으로 돌을 하나 주 실더라고. 내가 '아저씨 그거 돌 아이래요. 동제 지내는 돌 아이껴?'라고 하니 '돌 아이래요, 할매. 내가 돌 말라고 싣고 갈라는교' 했어. 난중에 돌 찾아내라 그라이 오십만원을 내놓더래요"라고 말했다.
별실도 십수 년 전 마을 경지정리 과정에서 돌이 파묻히는 바람에 동제가 끊어졌다.
우망과 별실의 석신(石神)은 경지정리와 낙동강 사업으로 각각 사라졌고, 동제는 이제 주민들의 가슴 속에만 남게 됐다.
◆우망국민학교와 보건소
우망국민학교와 우망보건소는 우망과 별실 주민들의 추억이 서린 곳이다.
1985년 우망에 들어온 우망보건진료소는 우망과 별실을 아우르는 소중한 기관이다. 1989년 우망보건소에 발령받은 뒤 22년째 근무하고 있는 정용분(55'여) 소장은 예천 지보면 출신으로, 집성촌 주민과 마찬가지로 동래 정씨다.
정 소장은 "보건소에 갓 발령받은 뒤 아기를 출산하는 집을 방문했는데, 마침 그 집 소가 새끼를 낳고 있었다"면서 "집 주인이 부탁하는 바람에 그 집 송아지를 먼저 받은 뒤 한참 있다가 애기 낳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말했다. 정 소장은 당시 탯줄에 목이 감긴 아기를 받아내고도 산모와 아기 모두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출산하게 한 기억을 되살렸다. 우망에 있던 보건소는 올해 초 청룡산 청룡고개 넘어 별실마을 입구로 옮겨 새 단장했다.
해방 2년 전 문을 연 우망국민학교는 독립투사 유근영이 세운 간이학교였다. 1943년 설립한 뒤 1945년까지 간이학교로 운영했던 우망국민학교는 해방 후 풍양공립보통학교 우망분교로 바뀌었다. 우망분교는 근대화의 물결 속에 점차 학생 수가 줄어들어 1996년 풍양초등학교와 통폐합되면서 사실상 폐교됐다. 지금까지 우망초교가 배출한 졸업생은 3천120명이다. 우망분교는 폐교됐지만, 주민들은 마을에 연고가 없으면서도 학교를 세워준 이 독립투사를 기념해 학교 터에 교적비를 세워놓았다.
◆면소재지와 시장
우망은 일제강점기까지 풍양면의 중심이었다. 풍양면사무소가 있었던 면소재지였다.
일제는 1914년 전국 317개 군을 220개 군으로 통폐합하는 지방행정체계 개편을 통해 식민통치를 쉽게 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용궁군이 예천군에 통합됐고, 우망마을에는 풍양면사무소와 함께 일본 경찰 지서인 주재소가 설치됐다.
당시 일부 주민들은 우망에 시장을 개설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마을 어른들이 "선비마을에 시장이 들어오면 마을을 번잡하게 만들기 때문에 안 된다"고 막았던 것이다.
결국 풍양면 지역의 큰 시장은 우망이 아닌 풍양면 낙상리에 들어서 '풍양장'이 됐고, 그곳이 현재의 면소재지가 됐다. 일부 주민들은 우망이 예천 풍양면의 중심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이때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여수경'이재민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장병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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