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슈카르에서 동북쪽으로 5㎞ 정도 떨어진 곳에 향비묘(香妃墓)라 불리는 유적지가 있다. 필수 관광 포인트가 될 정도로 유명하지만 정치적인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아치형의 입구를 지나면 눈앞에 둥근 돔을 가진 건축물이 우뚝 솟아있다. 벽면에 장식된 녹색의 타일이 햇살에 빛나고 있어 옥으로 빚은 왕궁처럼 느껴진다. 이 건물의 내부에 향비라고 불리는 위구르 여인의 묘가 있다. 이곳은 1640년쯤 당시의 지역 이슬람 최고 실력자 아바 호자가 지은 그들 가문의 묘지인데 5대에 걸친 가족들이 묻혀 있다고 한다. 크기와 화려함은 당시 호자 가문의 실력과 위구르족의 자존심을 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향비묘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중국 정부에 대항하려는 위구르인들이 상징적인 장소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 향비라는 여성에 대한 스토리는 여러 가지로 존재하고 있어 진실을 알기가 어렵다.
청의 황제 건륭제가 어느날 밤, 서역의 한 미인을 꿈속에서 만났다고 한다. 황제는 수소문하여 그녀를 찾으니 카슈카르에 있는 호자 집안의 딸이었다. 그녀는 총명하고 아름다웠으며 향수를 바르지 않아도 꽃향기가 풍겼다. 황제는 황궁으로 그녀를 데려가 향비라는 호칭을 주며 구애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시퍼런 비수를 자신의 목에 겨누며 거절했다. 황제는 매일 밤 서역의 음악을 연주시키거나 녹색 옥돌로 목욕탕을 만들어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했으나 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제의 모 황태후는 향비와 문답을 나누었다.
"너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서역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죽을 뿐입니다." "그러면 오늘 너에게 죽음을 주겠다." 황태후는 독극물을 주어 별실에서 자살토록 하였다고 한다. 향비의 유해는 3년 반이나 걸려 124명의 위구르인들에 의해 운구되어 카슈카르로 돌아와 영원히 잠들었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로는 건륭제 때 군사 침략을 단행한 청의 장군이 황제에게 선물로 바치기 위해 그녀를 사로잡아 베이징에 보냈다고 한다. 그녀는 카슈카르에서 한 부족장의 부인이라고도 하며 또 결혼을 약조한 사람이 있었다고도 한다. 이 여인은 자금성에 들어온 뒤 3년을 살았다는 설, 또는 26년을 살았다고도 한다. 어찌 되었든, 이 이야기가 적어도 위구르인들에게는 청의 정복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므로 향비는 민족적으로 저항한 위대한 여성이 됐다. 이처럼 향비 이야기가 자리 잡게 된 데에는 무슬림 위구르인들의 중국에 대한 이질감과 적대감, 중앙정부의 강압적 통치 역사가 존재하고 있다.
한편 위구르족의 주장과 달리 중국 측의 기록에 향비는 전혀 다른 인물로 나타난다. 1758년 카슈카르 지방에서 청나라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녀의 삼촌과 형제들이 이를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조정에서는 그 공을 인정해 관직을 하사했다. 위구르족으로 봐서는 민족반역인 셈이다. 건륭 25년 그들의 가족을 베이징으로 초대했다. 이때 미모의 그녀는 26세였는데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귀인'이 됐다. 1768년에 '용비'(容妃)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황제의 측실로 승진했다. 그녀는 황제의 지방순시에도 동행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으며 자금성에서도 위구르족의 전통 옷을 입고 이슬람 전통에 따라 생활했다고 한다. 향비는 입궁한 지 28년 되는 55세의 나이로 병사했고 유해는 카슈카르로 옮겨지지 않고 허베이(河北)의 청동릉(淸東陵)에 안장했다고 한다. 이야기가 이쯤되면 분명 향비는 한 사람인데 묘지는 두 군데로 중국과 위구르의 상반된 지향점을 알 수가 있다.
이 같은 배경을 잘 알고 향비묘를 방문하면 상황을 훨씬 더 이해하기가 수월해진다. 카슈카르 사람들은 죽은 뒤에 이 향비묘 가까이에 묻히길 바란다. 그래서 모스크의 바로 옆에는 위구르족이 묻혀 있는 다양한 모양의 공동묘지가 넓은 부지에 자리 잡고 있다. 무덤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난다고 하는데 죽어서라도 민족적으로 위대한 그녀를 칭송하겠다는 염원이 느껴진다.
관람을 끝내고 주자창으로 가는 출구 부근에 화려한 의상으로 몸을 장식한 위구르 여인들이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영업을 하고 있다. 현대판 향비의 이미지를 느끼도록 원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옆에 부착된 대형 사진에는 향비가 잔다르크처럼 철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패러디 형태로 묘사돼 있다. 잔다르크가 프랑스를 구해낸 전설적인 구국의 영웅인 것처럼 향비도 그 이미지를 오버랩시킨 것이다. 그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향비는 청에게 주권을 빼앗긴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느꼈다. 향비는 위구르족의 자존심이 되었고,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이 설화를 통해 그들의 염원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글'사진:박순국(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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