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학년 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 과 친구의 소개로 한 아동 복지 시설을 방문하였다.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그 당시 복지 시설 생활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오죽했으면 죄 없는 아이들이 죄지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교도소보다 더 형편없는 곳에서 산다고 했을까? 미취학 아동에서 18세까지 100여 명의 원생이 대가족을 이뤄 생활하고 있던 그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날 서툰 솜씨로 기타를 치며 아이들과 함께 노래하며 놀고 있었는데, 코흘리개 한 꼬맹이가 다가와 내 무릎 위에 슬쩍 앉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꼭 껴안아 주었는데, 정에 주린 행동이 가슴 아프기도 했지만 어린 친구의 앙상한 뼈마디가 더더욱 안타까웠다. 왜 이렇게 야위었을까?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그 궁금증은 금세 풀어졌다. 아이들의 식판에는 보리밥 한 주걱, 멀건 무국, 그리고 춘장 한 스푼이 배식되었다. 그것도 양이 턱없이 부족해 꼬맹이들은 순식간에 식판을 비우고도 허기를 채우지 못해 자리를 뜨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 식판을 내밀자 잠시 서로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서너 개의 숟가락이 다투듯이 오갔다.
그 꼬맹이와의 만남은 그때까지 형성되었던 나의 습성과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반찬 투정이나 하며 자랐던 내 어린 시절이 부끄럽고 죄스럽게 여겨졌다. 군부 타도, 민주 쟁취를 외치며 집회와 이념 학습에 쫓아다니고, 거의 매일 밤 소속 단체 회원들과 자유, 평등, 정의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곤 했던 자화상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모순 덩어리였는지를 깨닫게 만들었다. 그 꼬맹이는 나에게 이웃(민중)의 실체를 분명히 보여 주었고, 더불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만들었다.
8년이 지난 어느 날,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LG전자 구미연수원에 취업한 나는 또 다른 아동 복지 시설에서 다시 한 번 삶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그때 대구는 낙동강 페놀 사건이 발생해서 250만 시민들이 큰 고통 속에 있었다. 수돗물 대신 생수와 약수를 구하려고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도로는 차량 행렬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런데 내가 찾아간 그곳의 어린아이들은 페놀이 섞인 수돗물을 그대로 마시고 있었다. 안전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관이나 단체, 사람이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페놀 수돗물인 줄 알면서도 마실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사는 사회에서 고작 한 달에 한 번 시설 봉사하는 것으로 자족하며 사는 나의 위선이라니, 누군가로부터 뒤통수를 힘껏 얻어맞은 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해 말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환경운동가가 되었다.
그리고 또 십수 년 후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꼬맹이를 만났던 아동 복지 시설 출신 친구였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어엿한 숙녀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시설에서 생활하는 대부분의 친구들은 성장하면서 아주 먼 친척이라도 한 명 이상의 혈육은 꼭 만난다. 그런데 이 친구는 십여 년간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단 한 명의 일가친척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이 지구 상에 가족은 달랑 자기 혼자였다. 얼마나 외로움에 절었을까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그때까지도 나를 선생님으로 호칭하던 그 친구에게 앞으로 오빠라고 불러라 했더니 그날 헤어지면서 모기만 한 목소리로 '오빠, 안녕히 가세요' 했다. 그녀는 나의 유일한 여동생이 되었고, 나는 그 친구의 유일한 가족이 되었다. 그 뒤 착한 사람을 소개시켜 여동생은 결혼을 하였고, 1남 1녀의 조카들과 함께 그토록 원하던 자신의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예수는 가장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자기에게 해 준 것이라 했다. 코흘리개 꼬맹이, 페놀 수돗물 마시던 어린아이, 그리고 남매의 인연을 맺은 여동생은 내가 만난 예수였다. 이렇게 내 인생의 첫 수업은 가난한 이웃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로부터 이루어졌다. 여태껏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이 삶의 근저에서 떠나지 않도록 지치거나, 이기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채찍질하며 다잡아 준 그들은 진정한 내 인생의 스승이었다.
문창식(간디문화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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