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의 경이로움은 자연의 운행과 식물의 생체 시계가 조응된 결과다. 무심해 보이는 꽃들도 나름의 셈법으로 봉오리를 틔울 시기를 조절한다. 거문도의 숲 속에서 겨울을 열어젖힌 동백을 선두로 산수유-매화-개나리-벚꽃이 시차를 달리하며 산야를 물들였다. 한 치도 어김없는 질서, 이른바 꽃들의 릴레이다. 봄꽃의 계주(繼走)는 어느새 대단원. 최종 주자인 철쭉이 남도에서 화신(花信)을 띄우고 있다. 어느새 절기는 소만(小滿)을 지나 봄꽃을 거두어 간다는 망종(芒種)을 눈앞에 두고 있다. 화(花)들짝 놀란 철쭉이 장흥 제암산을 핑크빛으로 물들였다.
◆장흥, 보성벌 가르며 기운차게 솟아오른 산=정맥(正脈)은 백두대간과 더불어 한반도 산맥의 뼈대를 이루는 산줄기. 그 중 호남정맥은 전남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산맥이다.
장수 주화산에서 몸을 일으킨 산맥은 광주 무등산을 지나 장흥으로 접어들면서 바다에 잠시 몸을 적신다. 해풍에 잠시 숨을 고른 산줄기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이곳이 바로 제암산이다.
흔히 제암산은 '평원을 달리는 준마'에 비유된다. 장흥벌과 보성벌을 가르며 기운차게 솟구친 산의 위용을 빗댄 말이다. 산의 정상엔 '임금 제(帝)'자 모양을 하고 있는 임금바위가 있다. 제암산(帝岩山)이라는 산 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
보통의 봄꽃들은 꽃을 피우고 나서 꽃이 질 때쯤 잎새를 밀어올린다. 같은 뿌리에서 나지만 잎과 꽃은 운명적으로 만나지 못한다. 또 서둘러 꽃을 피워내느라 보통 단색인 경우가 많다. 벚꽃이 화려하긴 하지만 수묵으로 치면 담채에 가깝고 산수유 접사(接寫)도 노란색의 단일구도만 맞추면 된다.
철쭉은 꽃과 잎이 동시에 나온다. 기존의 봄꽃이 색의 일방적 독주였다면 철쭉은 화엽(花葉)의 조화로 가치를 키운 꽃이다. 꽃 자체로도 매력적인데다 연둣빛 신록의 후광까지 입으니 철쭉 군락지는 홍록(紅綠)의 축제요, 색의 향연이다.
비경은 자연스럽게 사람을 끌어 모으고 이는 축제로 연결된다. 우리나라 철쭉 축제 시작은 어디일까. 인터넷에 검색어를 넣어보니 소백산이나 비슬산, 지리산쯤 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제암산이 철쭉제의 제1호라는 결과가 나왔다. 1997년 장흥의 산악인,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 벌인 축제는 올해로 21회째를 맞았다.
제암산의 등산로는 용추폭포-골치-사자산-곰재산-제암산으로 올라 휴양림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가장 인기가 좋다. 들머리 용추폭포 입구엔 편백나무 군락지가 있다. 짙은 그늘을 드리우며 하늘로 가지를 뻗친 기상이 시원스럽다. 최근에 피톤치드가 많이 배출된다고 해서 웰빙 산책로로 인기가 높다. 좌우로 도열해 있는 편백의 호위를 받으며 등산로를 오른다.
800m가 채 안 되는 소규모 산이지만 등산로는 제법 가파르다. 1시간쯤 올라 골치에 이른다. 좌우의 조망이 베일을 걷어낸다.
◆일림산-사자산-곰재능선 따라 붉은 융단=왼쪽으로 일림산 정상의 붉은 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말 그대로 분홍빛 융단이다. 단순 규모로만 본다면 일림, 제암산에서 최대 군락지는 일림산 정상 부근이다. 2000년부터 개발된 일림산 철쭉은 330만㎡(100만 평) 규모로 전국에서도 '톱3' 안에 든다.
일림산 철쭉의 유혹을 물리치고 오늘 목적지인 제암산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20분쯤 걷자 사자산 미봉(尾峰)이 시야에 들어온다. 등산로 양옆에서 조금씩 보이던 붉은 점들이 617봉에 이르자 붉은 카펫을 펼쳐놓았다. 말 그대로 산상 화원이다. 여인의 가르마 같은 길을 따라 등산로는 이어진다. 허리까지 차오르는 꽃물결 사이를 향기에 취해 걷는다.
소나무 그늘에서 들뜬 기분을 진정시키고 사자봉을 향해 오른다. 꽃물결에 반한 듯 사자도 갈기를 세우고 꽃향에 젖는다. 제법 가파른 경사를 올라 사자산에 이르렀다. 이제 방위는 북으로 향한다. 비로소 해를 등지고 직사광선에서 벗어난다. 단재를 넘어서자 곰재산 군락지가 발길을 잡는다. 또다시 1㎞ 남짓 하늘정원이 펼쳐졌다. 자연산 철쭉 50년생 10만 그루가 빚어내는 장관에 셔터를 누르는 손길만 바빠진다.
◆동학농민전쟁 이방언 장군 비극 서린 웅치=곰재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들이 추적을 피해 숨어들었던 곳이다. 지명 웅치(熊峙)도 곰재에서 유래됐다. 장흥은 농민전쟁 당시 남도장군으로 불리던 이방언(李邦彦)의 활동 지역이고 웅치면은 접주가 설치되었을 정도로 농민군 활동의 거점이었다. 외세의 개입으로 농민 봉기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이방언은 철쭉이 온 산을 물들였던 1895년 4월 25일 장대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마침 이 무렵이다. 죽음을 앞둔 그의 마지막 시선이 머문 곳은 온 산을 붉게 물들였던 바로 이 철쭉이 아니었을까.
곰재에서 다시 정상을 향해 오르막길을 치고 오른다. 오늘 등산 전체 일정 중 가장 험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어쩌랴. 오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산꾼의 숙명인 것을. 드디어 제암산 정상에 선다.
20여m에 이르는 임금바위는 거대한 직벽구조로 오르기가 무척 까다롭다. 체중을 지탱할 곳을 찾아 조심스럽게 올라선다. 넓은 바위 위엔 벌써 조망을 즐기는 관광객들이 진을 치고 있다. 동쪽으로 고흥반도와 다도해의 풍광이 아늑하고 남쪽 장흥 들판으로 사자산 천관산 너울이 일렁인다. 멀리 광양의 백운산과 월출산도 한 점 풍경으로 다가선다.
4시간여 일정을 마치고 제암산 휴양림으로 하산을 서두른다. 지는 해를 잡아두려는 듯 담안재 호수 물빛도 붉은 노을로 반짝인다.
봄 산행 여흥이 아직 남아 있다면 수산항에 들러 키조개를 안주 삼아 하산주를 한잔하는 것도 멋진 이벤트가 된다. 키조개 관자와 한우, 표고버섯을 돌판에 구워먹는 이른바 '장흥 삼합'이 여행자들의 입맛을 자극한다.
5월 남도의 봄, 산 위 철쭉은 아직 붉다. 산 아래엔 계절을 재촉하는 아까시향이 그윽하다. 귀갓길 노을진 바다에서 하산주에 취기가 오르면 산객은 느릿느릿 스틱을 접는다. 빨간 여운 하나 가슴에 담고.
◆교통=구마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진주에서 남해고속도로로 바꿔 탄다. 순천에서 내려 국도를 타고 보성~장흥 방면으로 진행한다. 장흥에서 웅치면으로 들어가 제암산자연휴양림 방향으로 간다.
◆맛집=▷바다하우스(061-862-1021), 장흥 수문리. 키조개, 표고버섯, 한우를 구워 먹는 '장흥삼합'이 유명하다. ▷영천민물장어(061-862-9906), 장흥 운흥리. 민물장어 요리로 유명한 집 ▷정남진회타운(061-862-6700), 장흥 수문리. 바지락회.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우원식 "최상목, 마은혁 즉시 임명하라…국회 권한 침해 이유 밝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