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선유도 원주민 처녀

선유도 해변은 그림이었고 한편의 시였다

선유도 유혹은 편지 한 줄 때문이었다.

"서해의 뻘밭은 동화의 나라 그대로입니다. 조수간만의 차가 없는 동해만을 바다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바닷물이란 바닷물은 죄다 빠져나간 서해의 뻘밭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옆으로 달리면서 바로 가는 줄 아는 게들의 뜀박질, 밀물 따라 들어왔다가 썰물 따라 빠져나가지 못한 새우들의 팔딱거림, 뻘밑 구멍 속에 손을 넣으면 뭉클한 감촉이 전해오는 낙지와의 만남, 이런 것들이 선유도 갯벌이 주는 선물입니다. 선유 팔경 중 제1경인 선유낙조는 행복을 좇는 이에겐 행복한 환상을,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는 늙은이에겐 허무의 실체를, 멋진 젊음을 구가하는 젊은이에겐 밀어의 달콤함 같은 그런 풍경입니다. 선유도에 와서 지는 해의 서러움을 느껴보지 않고선 감히 이곳에 와 봤다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육지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선유도에서 살았으면 합니다. 원주민 처녀와 결혼하여 원주민을 닮은 그런 아기를 낳고 싶습니다."

어느 해 여름, 지인이 보내온 선유도 편지를 읽고 오랜 몸살을 앓았다. 안 가보곤 못 견딜 것 같았지만 나를 묶고 있는 인연의 끈들이 쉽게 풀어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 배낭 하나 달랑 둘러메고 군산으로 달려갔다. 여름도 늙어 버렸는지 성수기 때 하루 두 번 왕복하던 정기 여객선도 데크에 발목을 묶고 쉬고 있었다.

아하, 한발 늦었구나. 여름 사람들이 떠나 버리자 배는 일주일에 두 번 왕복으로 편수를 줄여 버린 상태였다. 민박집에 짐을 풀고 인근 식당에서 고기 토막을 주먹만큼 크게 썬 아귀탕 한 그릇을 사 먹고 들어왔다. 멍석 위에 앉아 있으니 지금은 고인이 된 가수 박경애가 '곡예사의 첫사랑'이란 노래를 열창하고 있었다. 선유도에 가서 낙지 잡고 고동 줍는 꿈이 곡예사의 서글픈 사랑처럼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 다음 해, 재도전에 성공했으나 선유도는 시설이나 환경이 여러 가지로 미비했다. 섬사람들이 특급이라고 권하는 선유중학교 앞의 여관을 숙소로 잡았지만 마당만 클 뿐 하급 여인숙 수준이었다. 그래도 선유도의 명물 망주봉과 바다가 알맞게 내려다보였다. 그보다는 저녁상에 오른 못생긴 서대란 생선으로 끓인 매운탕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더니 바로 그랬다.

선유도의 장관은 우리가 머물고 있는 선착장 주변의 중앙지역이 아니라 해수욕장에서 장자도로 넘어가는 섬 뒤편에 있었다. 초승달의 곡선처럼 알맞게 휘어진 2㎞가 넘는 아름다운 해변은 그야말로 그림이었고 한 편의 시(詩)였다. 우째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선유도에 왔으니 선유 낙조를 놓칠 수야 없지. 해변의 언덕에 올라서니 역광으로 비친 섬들의 실루엣은 장려한 낙조 속에 황금빛 후광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지나가는 저녁바람을 안은 돛단배의 모습은 물감을 나이프로 찍어 살평 바른 거친 마티에르 그대로였다.

아름다운 선경을 보면 왜 술이 당기는지 모르겠다. 상에 술상을 차려달라고 부탁했다. 짭조름한 갯것 반찬 사이에 대장처럼 군림하는 서대 회 무침은 또 다른 별미였다. 잠은 학교 숙직실에서 자고 여관에 밥을 대놓고 먹는 외지에서 온 선생님들과 합석하여 소주잔을 주고받았다. 달은 어느새 동쪽 하늘에 훤하게 떠올라 조촐한 잔치자리의 등불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달은 밝고 바다는 혼자 칭얼대며 옹알이를 하는 멋진 밤이다. 이 밤을 이대로 보내면 죄가 될 것 같았다. 벌떡 일어섰다. 큰 키가 휘영청 달빛 아래서 몇 번 휘청거렸다. 아무도 청하지 않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Till 푸른 밤하늘에 달빛이 사라져도 사랑은 영원한 것, Till 찬란한 태양이 그 빛을 잃어도 사랑은 영원한 것. 오! 그대의 품안에 안겨 속삭이던 사랑의 굳은 맹세, Till 강물이 흐르고 세월이 흘러도 사랑은 영원한 것."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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