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분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은 젊은 시절 무척 가난했다. 추수 때 거둔 곡식은 고작 12석. 이를 12등분해 매달 먹는데 열흘 뒤에 양식이 떨어지면 다른 물건을 변통해 양식을 구한 후 죽을 끓이게 했다. 새달 초하루가 되어야만 비로소 곳간의 곡식을 꺼내 먹었다. 그나마 형편이 조금 나아진 중년에도 다달이 먹을 양식만 꺼내 쓰는 등 계획된 소비를 했다. 그는 아무리 군색해도 다음 달 먹을 양식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누가 봐도 뻔한 선비의 살림살이에 식솔이 굶지 않으려면 분수를 넘지 않는 절제가 몸에 배지 않을 수 없었을 터다. 이처럼 남의 것이 아닌 제 양식도 형편에 맞게 아껴 먹고 다스릴 줄 알았던 것은 당시 성호만의 살림법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요즘 항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저축은행 대주주들의 비리와 탐욕상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800억 원대의 불법 대출을 일삼다 구속된 한 저축은행장은 명품 오디오에 고가의 수입차 10여 대를 타고 다니다 철창신세를 면치 못했고 어느 저축은행 회장은 평소 금목걸이를 주렁주렁 걸고 다니다 이번에 대신 은팔찌를 찼다. 월인석보 등 문화재 1천여 점을 소장하다 가압류된 저축은행장도 있다.

이들의 초호화 취미 생활과 기호품 구입에 쓰인 돈이 서민들의 피땀 어린 쌈짓돈이었다니 말문이 막힌다. 더욱 괘씸한 것은 이들을 비호하며 뒷돈을 챙긴 공직자들이다. 금감원과 감사원 간부들이 구속되거나 조사를 받고 있고 머잖아 국세청'정치권에도 불똥이 튈 것이라고 한다. 공직자 윤리는 오간 데 없고 엉뚱한 데 힘을 낭비하다 패가망신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에서 성호의 살림법이 한참 군색해 보일 정도다. 옛말에 대부는 텃밭을 일구지 않고, 창고를 위임받은 관리는 시정의 이익을 탐하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직위를 이용해 치부한 공직자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거세개탁(擧世皆濁)이 따로 없다.

다산 정약용의 문집에 이런 글이 있다. '낙무편비 복망편독'-지나치게 주는 즐거움은 없고 과도하게 도타운 복도 없다. 무엇이나 정도와 한계가 있는 법이란 의미인데 있을 때 더 나누고 넉넉할 때 아껴 쓸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복도 즐거움도 경계한 선현들이 사치와 부정을 어떤 눈으로 보았을지는 더 말할 필요가 있겠나.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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