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물길이 북, 서, 남을 에두르고 비봉산에서 뻗어내린 구무산과 장갈산이 마을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 새는 장갈산과 구무산을 머리와 몸통으로, 불텀산과 신구실을 양 날개로 해 알을 품고 있다. 한쪽 날개인 야트막한 신구실 곁에는 대비나루터가 수백 년 동안 남쪽 소금배와 북서쪽 상주시내와 소통할 수 있는 교통로 역할을 해왔다. 새의 또 다른 날개인 불텀산은 댐 수몰민이 옮겨와 정착한 새로운 둥지가 됐다.
상주시 중동면 오상2리 대비. 새가 알을 품은 '조비포란형'(鳥飛抱卵形) 마을로, 새가 큰 날갯짓을 한다고 '大飛'(대비)'이다.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400년 이상 유유자적해왔고, 20년 전 수몰민까지 포근히 감싼 마을이다.
◆상산 김씨, 마을에 뿌리내리다
대비마을 표지석에는 '대비동(큰비란)은 太小白의 영맥이 이어지고, 낙동강이 삼면을 회류(回流)하는 곳이며, 조선시대 오산(梧山)서당이 자리하면서 중동지역의 문학과 시례(詩禮)를 흥기시킨 고장'이라고 적혀 있다.
대비가 비봉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와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인 명당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1551년(명종 6년) 상산 김씨인 후계 김범이 대비 나루터 인근 낙동강변에 세운 오산서당은 임진왜란 때 불타는 바람에 오상1리 오동에 중건했다 1719년(숙종 45년)에 또 화재가 나 대비마을로 옮겼다. 서원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돼 현재는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마을표지석은 또 '서기 1602년 상산(商山) 김씨 통정대부(通政大夫) 김일래(金日來) 선생이 시거(始居)하여 삶의 터전을 이루었고, 1700년경 여산(礪山) 송씨와 달성(達城) 서씨가 내거(來居)하였으며, 1990년 안동 임하댐의 조성으로 인해 30여 가구가 정착하여 부락을 이루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비에 처음 정착한 입향조는 통정대부를 거쳐 이조참판까지 지낸 김일래 선생이다. 김 선생은 원래 대비마을 앞 낙동강 건너 현 상주시 도남동 도남서원(1606년 창건) 터 옆에 살다 집이 불타는 바람에 1602년 대비로 왔다고 한다. 이후 약 100년 뒤 여산 송씨 송유강 형제가 경기도 여주에서, 달성 서씨 서일이 영천에서 각각 이주하면서 세 성씨가 모여살기 시작한 것이다.
◆하남, 망향가를 부르다
'흘러 흐르거라 비봉을 감아돌아라/ 하남 구곡상류 반천년 열두동네/ 이끼 묻은 주춧돌 벌레 먹은 서까래/ 갈앉은 임하다목적댐을 뒤돌아보던 날/ 낙산 아기산(鵝岐山) 뼈마디가 들썩거리고/ 소쩍도 부엉도 차마 설워 목을 태웠지/ 안동땅 동쪽 반변 구곡상류 하남/ 악사 도연 국난 화곡 지풍 후평 천곡 지동/ 아 세세년년 글 읽으며 밭갈던 고향/ 낯설고 물설은 땅 상주 중동 오상리/ 꿈에선 아기산 솔소리 깨면 낙연 물소리/ 저산 마루 뜬 구름 신산(辛酸)을 삭이고 삼키면서/ 비봉산하 낙강 물머리 대비마을 여기에/ 보아라 육성우향 서른네집 새터 열고서/ 웅비할 기상으로 나래접고 앉아라/ 흘러라 흘러 흐르거라 비봉을 감아 돌아라/ 하남 구곡상류 산자락이여 물굽이여.'(하남우향:河南寓鄕)
대비 입구에 서 있는 비석에 새겨진 글귀이다. '하남(사람들)이 의지해 사는 고향'이다.
오죽하면 산(山) 뼈마디가 들썩거리고, 소쩍새와 부엉이가 서러워 목을 태웠을까. 안동 하남 사람들의 서글픈 망향가이다.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의 가슴 저미는 망향시이기도 하다. 하남(河南)은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 곁에 형성된 안동 임동'길안'임하 등 3개 면 12개 마을을 지칭한다.
1990년 7월 1일, 대비마을 앞에서는 구슬프면서도 뜻 깊은 입촌식이 열렸다. 임하댐이 건설(1984~1993년)되면서 반변천 주변 상당수 마을이 수몰됐고,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이 가운데 임동'길안'임하면 9개 동 34가구가 이곳 대비마을로 옮겨온 것이다.
90년 집단이주추진위원회 임원들은 구미 해평면 일선리, 상주 중동면 강창교 주변, 중동면 오상1리 까치골 주변 등지를 직접 돌아다닌 끝에 이 대비마을을 제2의 고향으로 택했다.
이주추진위원장을 지낸 안상봉(76) 씨는 "이 마을로 이사 오기 전 두세 군데 봤는데, 그 중에서도 여기 터가 제일 낫다 그래가지고. 처음 와보니까 서글프더라고. 집집마다 낙동강 하천부지를 불하받았지"라고 말했다.
안 씨는 이주과정에서 '하남우향'을 새긴 돌뿐 아니라 고향 반변천 가에서 큰 바위 10여 개를 대비의 집 앞마당으로 옮겨놓고 향수를 달래고 있다.
◆새마, 본마와 어우러지다
하남 사람들이 대비마을로 이사하기 1년 전인 1989년 안동시와 상주시는 대비마을 인근 낙동강에 제방을 새로 쌓았다. 이주민들의 생계터전이 될 새로운 농토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당초 상주 중동면 오상2리 '번개들' 바깥쪽에 축조한 제방을 미루나무가 들어서 있는 하천부지 바깥쪽 강변으로 쌓으면서 새로운 들판이 형성된 것이다. 제방을 강변 쪽으로 축조하면서 34㏊의 새 '갱빈들'을 확보했고, 이 땅을 34가구에 1㏊(3천 평)씩 추첨을 통해 분배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하천부지 가운데 기존 약 1만 평을 소유하고 있던 주민이 있어 문제가 불거졌다. 결국 이주민들은 당초 불하받기로 했던 3천 평 중 100평씩 양보해 3천400평을 기존 땅 주인에게 주고, 갱빈들에서 각각 2천900평씩 농사를 지으며 대비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대비에는 갱빈들 농지정리 후 이듬해 적갈색 벽돌집 서른 채가 완공됐다. 하남 사람들의 주거지는 조비포란형 지형의 대비마을에서 당초 새의 왼쪽 날개에 해당하는 야트막한 불텀산 자락이자, 밭 자리였다. 야산 자락과 밭을 정리한 뒤 집을 세운 것이다. 하남 34가구가 대비마을로 옮겨오기로 했으나, 4가구는 이름만 올려놓은 바람에 실제로는 30가구가 이사를 했다.
안동 하남 주민들이 옛 고향에서 가져온 돌에 '하남우향'이란 글귀를 새겨 상주 대비 입구에 세운 뒤 입촌식을 가진 지 이제 꼭 21년이 됐다. 대비마을 뒤편 장갈산에 올라서면 마을 입구를 지키는 500년 된 느티나무를 기준으로 좌우로 집들이 뚜렷이 구분된다. 느티나무를 기준으로 동쪽으로는 오래된 기와집 30여 채, 서쪽으로는 적벽돌집과 새로 지은 양옥집 등 30여 채가 대조적이다. 동쪽 기와집들은 예부터 정착해온 '본마'이고, 적벽돌집 등은 주로 안동 하남에서 20여 년 전 집단 이주해온 '새마'이기 때문이다. 새마는 안동 하남 수몰민의 정착지인 셈이다. 새마와 본마 사람들은 각각 느리면서 부드러운 말씨, 억세면서도 큰 목소리의 말투를 비롯해 언어, 생활방식, 문화 등 차이점으로 인해 쉽게 어우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서로 동화됐고, 2005년에는 하남 이주민들 중에서 처음으로 마을 이장이 뽑히기도 했다.
◆대비못과 효부비각, 마을을 지켜오다
오상2리 대비에서 오상1리로 넘어가는 탑재 밑자락에는 자그마한 저수지와 비각이 눈길을 모은다. 이 저수지는 상수도와 양수장을 건립하기 전인 1980년대 후반까지 대비의 젖줄이 되었던 대비못이다. 1945년 축조된 대비못은 마을 앞 '고래실들'의 논농사를 가능하게 한 소중한 못이었던 것. 대비못은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유일한 원천이자, 어린이들의 썰매장과 부녀자들의 빨래터가 되기도 했다.
대비못 옆 비각은 조선시대 입향조인 상산 김씨 집안의 며느리인 밀양 박씨를 기린 비를 감싸고 있는 효부비각이다. 이 밀양 박씨는 1886년(고종 23년) 고을에 괴질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는 와중에서도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며 효를 다하고, 자녀들까지 훌륭하게 키워 가문을 일으켰다고 한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여수경'이재민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장병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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