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추풍령 너머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보름 전 과학벨트 유치 운동이 한창일 때 경북도청에 내걸려 있던 구호가 아직도 기억난다. 얼핏 자조적인 문구 같기도 하지만, 그 속에 내포돼 있는 의미를 곰곰이 따져보면 너무나 섬뜩하다. 소백산'추풍령 아래에는 '국민이되 국민이 아닌' 사람들만 살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피상적이고 선동적인 구호가 전혀 아니었다. 영남권 신공항'과학벨트 유치 실패 과정을 지켜보면서 지역민이라면 누구나 생생하게 실감한 얘기였다. 정말 웃기는 것은 지방에 내려가는 자그마한 몫도 빼앗으려 드는 흉포한 사람들과 같은 국민으로 살고 있다는 점이다. 수도권은 온갖 경제적'문화적 혜택을 독점하는 것도 부족한지, 지역에서 자그마한 교통'과학 인프라를 가지려 해도 조직적으로 훼방 놓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지역에서 오랫동안 일하다 정부 기관으로 자리를 옮긴 한 분도 섬뜩한 얘기를 들려줬다. "서울 사람들은 '지역'이라는 말만 꺼내도 거부 반응을 일으켜요. '지역 균형 발전' 얘기라도 나오면 '이런 꼴통이 있나' 하는 표정부터 짓습니다." 수도권에서 지역을 바라보는 사고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폐쇄적이라고 했다.
수도권과 지방의 불균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 취임 후 그 정도가 훨씬 심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느 정도 지역 배려 정책을 펼쳤지만, 현 정부는 효율과 실리를 앞세워 그것마저 내팽개쳤다. 어느 틈인가 약육강식의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가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수도권 이기주의에는 진보나 보수가 따로 없는 것 같다. 그네들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남북 관계나 동서 간 지역감정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현재도 소백산'추풍령에는 보이지 않은 국경선이 그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백산'추풍령 위쪽에는 잘사는 사람과 젊은 사람들만 살고, 그 아래쪽에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 수도권에서 대학 다닐 능력이 있거나 좋은 직장을 얻으려는 젊은 사람은 남쪽에서 국경선을 넘어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국경선을 넘을 수조차 없다. 국경 검문소는 선택받은 사람만 선별적으로 통과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역에는 넥타이 맨 사람을 잘 볼 수 없을 정도로 제대로 된 직장도 많지 않고 뜻을 펼칠 공간도 그리 넓지 않다. 이런 마당에 젊은 사람들에게 어찌 황량한 지역에 남아있으라고 권할 수 있겠는가.
얼마 전 구미에서는 닷새간의 단수 사태로 주민들이 큰 고생을 했다. 시민 몇 분이 신문사로 전화를 주셨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서울 시민 56만 명이 이렇게 고생을 했다면 정부나 언론에서 가만있었을까요?"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방송 뉴스에는 잠깐 동안 시간을 할애해 보도했고, 수도권 신문도 사회면 하단에 자그맣게 취급하는 데 그쳤다. 서울 사람이 고생하면 대문짝만 하게 다루는 뉴스도 지역에서 일어나면 아무렇지 않게 취급되고 만다. 1등 국민, 2등 국민의 차이는 이렇게 크고 뚜렷한 것이다. 결국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귀족이고 그 아래쪽에 사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천민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렇다면 서로 갈라서는 게 옳을 것이다. 부부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헤어지는데 하물며 국가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국가란 모든 국민이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존립하는 것이지, 일방이 일방을 억누르고 짓밟는다면 함께할 이유가 전혀 없다. 1천 년 만에 또다시 '후삼국시대'가 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런 사태가 벌어질 리 없겠지만, 향후 정서적 심리적 분리독립 현상이 심각해질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앞으로도 얼마나 '소백산'추풍령 너머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구호를 외쳐야 할지 생각하니 너무나 끔찍해진다. 더 이상 자존심을 상해가면서 수도권에 애걸복걸 매달리고 싶지도 않다. 수도권에서 내려주는 찌꺼기나 받아먹으며 원전과 방폐장이나 갖다놓는 지역으로 남아있고 싶지도 않다. 이런 불평등이 계속된다면 대한민국은 더 이상 미래가 없다.
박병선(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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