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혼] 제2부-신라정신 7)코스모폴리탄 도시, 신라의 도전

육상·해상 통해 유라시아 세계문물 수용…모든 길은 서라벌로 통했다

신라의 국제항으로 외국 상선들이 드나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울산시 남구 황성동에 위치한 개운포. 지금은 각종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바다 가운데 보이는 섬이 처용암이다. 사진
신라의 국제항으로 외국 상선들이 드나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울산시 남구 황성동에 위치한 개운포. 지금은 각종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바다 가운데 보이는 섬이 처용암이다. 사진'이채근기자
일본인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가 자신의 저서
일본인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가 자신의 저서 '신라사기초연구'에서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추정해 작성한 신라의 전국 5통(五通) 도로망은 경주를 중심으로 전국이 연결돼 있다.

"달밤에 고향길 바라보니/…/내 나라는 하늘끝 북쪽에 있는데/남의 나라 땅 서쪽 모퉁이에 와 그리워하네/…/누가 고향의 숲을 향해 날아가려나."

16세에 당나라로 유학, 천축(인도)으로의 구법 순례중 달밤에 고향 신라를 그린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慧超'704~787)의 시다.

일연(一然)은 삼국유사에서 "천축으로 불법을 좇아 떠났다가 신라나 당에 돌아온 자는 없었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험난했다. 파로사국(婆魯斯國'수마트라 서해안)에서는 신라 승려 2명이 병사했다고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은 기록했다. 신라인의 모험과 도전, 개척정신을 잘 보여준다.

◆국제도시, 서라벌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엔 곡량택(谷良宅), 가을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 성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서울부터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가옥이 즐비하고 담장이 잇따랐다. 피리와 노랫소리가 한 길에 끊어지지 않았다."

삼국유사는 전성기 시절 경주에 17만8천936호(戶)가 있었다고 했다. 100만 명쯤 살았으리라. 귀족들은 사철 번갈아 살았던 별장(四節遊宅)을 가졌고, 부호(富豪)들의 저택인 '금입택'(金入宅)도 35개 있었다. 경주는 '세계의 시장'이자 국제도시였던 당(唐) 수도 장안(長安)의 인구와 맞먹는 코스모폴리탄 '국제도시'였다.

지리적으로 외진 곳이었지만 세계와 소통했고, 육상과 해상을 통해 외래 문물을 적극 받아들였기에 '모든 길은 경주로 통했으리라'.(도로망 지도 및 해상교역로 참조)

경주의 국제적인 배후 항구는 개운포(開雲浦'울산항)였다. 이곳에서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라비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의 물품 등 이국(異國)산품들이 쏟아졌다. 공작'앵무'구관조'물소'낙타 등 동물들과 향료, 약품을 비롯한 각종 진기한 물건들이 들어왔고, 일부는 다시 일본에 전달됐다.

신라 물품도 수출했다.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820~912)는 저서에서 "중국의 동해에 있는 이 나라(신라)로부터 가져오는 물품은 비단(綢緞), 검(劍), 사향, 말안장(馬鞍), 초피(貂皮'담비가죽), 범포(帆布), 도기 등이었다"고 적었다.

강원대 김창석 교수에 따르면 752년 일본 파견 신라사절단으로부터 일본 귀족들이 구입하려 제출한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에 포함된 향료'약재(香藥), 안료(顔料), 염료는 중국,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 북아프리카 생산품인 것으로 분석됐다. 신라 사절단이 가져간 물품 중 신라산(추정)은 86건이었고 외국산은 160건이었다.

한때는 사치품 사용을 규제했다. 사치품 수입 증가와 사치풍조 만연, 신분질서 동요를 막기 위해서였다. 흥덕왕(興德王'834년)은 골품제에 따른 신분별 용도별 사치품 사용금지 교서를 내렸다. 아랄해 동쪽 지금의 타슈켄트에서 나는 슬슬(瑟瑟'에머랄드), 캄보디아산(産)의 비취모(翡翠毛'비취새의 깃털), 인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나는 공작미(孔雀尾),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일대가 원산지인 대모(玳瑁'거북등껍질), 답등(털자리), 호피(虎皮) 등 수많은 품목의 사용이 금지됐다.

◆세계 문물 수용에 나선 신라인들

"신라 천년은 끊임없는 창신(創新)의 역사였다. 신라는 한반도 동남쪽에 자리하였으나 전혀 고립되지 않았다. 끊임없이 소통하고 자신의 문화를 밖으로 내보냈다." 이영훈 국립경주박물관장의 설명이다.

2008년 경주에 이어 대구에서도 페르시아·서아시아 유물관련 특별전을 통해 신라와 서아시아와의 교류 유물을 선보였다. 경주 출토 유물들은 생생한 증거였다. 황금 장신구나 유리그릇은 4~6세기 유라시아대륙과의 접촉을 통해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됐다. 신라 황금 장신구에 사용된 다양한 금세공기법이나 무늬는 지중해 연안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거쳐 신라에 유입돼 절정기를 맞았다는 것이 경주박물관의 분석이다.

경주 봉황대 남쪽 무덤에서 나온 금동신발바닥의 거북등무늬는 사산조 페르시아(224~651)에서 유행한 문형을 보였고, 경주 황남대총 북쪽 무덤의 금팔찌는 흑해나 이란 등 서역계 제작기법과 유사했다. 계림로 14호 무덤 출토 보검(寶劍)의 제작지는 중앙아시아나 흑해 연안, 페르시아 중 한곳일 것으로 여겨졌고, 황남대총 북쪽 무덤 은잔(銀盞)과 거북등무늬도 페르시아 등에서 제작 혹은 유행한 기법'무늬였다.

경주의 4~6세기 무덤에서 출토(25점)된 유리그릇도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제작된 '로만글라스'와 사산조 페르시아 것으로 추정됐다.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서 나온 봉수형(鳳首形) 유리병은 시리아 등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제작됐거나, 칠곡 송림사 사리갖춤(舍利具) 안의 녹색 유리잔(琉璃杯)도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행 무늬였다.

천마총 유리잔은 시리아와 이란 등지에서 발견되는 그릇들과 비슷했다. 서역계통의 상감(象嵌) 유리구슬은 경주 황남대총과 서봉총, 금관총, 금령총, 천마총 등에서 나왔는데, 특히 미추왕릉의 새와 사람 얼굴이 새겨진 상감 유리목걸이 경우 제작지가 서아시아나 로마 등 지중해 연안으로 알려졌다.

경주 인동총(忍冬塚)의 청동합(盒)과 금관총의 청동자루솥 등의 넝쿨무늬나 당초문(唐草文), 함조무늬(含鳥文), 포도넝쿨무늬(葡萄唐草文)도 서아시아에서 전해진 것이고, 안압지 출토 수막새기와(瓦唐)의 보상화무늬(寶相華文) 및 넝쿨무늬 암막새'수막새, 포도넝쿨무늬 암막새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박물관 김유실 학예연구관은 "이런 무늬들은 페르시아와 서역 계통의 것으로 신라가 중국보다 앞섰다"고 말했다.

아울러 삼국사기에 나오는 박판(拍板)과 당비파(唐琵琶) 등 악기도 서역에서 유래했으며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 나오는 금환(金丸'곡예놀이의 일종), 속독(束毒'가면무의 일종) 등 다섯가지 놀이도 서역 계통이라고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가 자신의 책에서 밝혔다.

일본인 요미시즈 즈네오는 '로마문화 왕국, 신라'라는 책에서 "신라 금관과 금제 장신구의 형식과 기법이 그리스 로마의 전통과 가깝다. 신라의 장신구는 로마의 디자인과 기술을 받아들여 제작됐지만 신라인의 독자적인 감성과 행각, 전통 의장이 가미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로마 유리그릇들은 같은 시대 고구려 백제 중국 유물에선 찾아볼 수 없는 신라만의 독특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라인들의 도전

서학(西學) 유학 바람은 유학파 승려로 세속오계를 전파한 원광(圓光)이 계기가 됐다. 삼국유사는 "진나라와 수나라 시대에 우리나라 사람 중 바다 건너 도를 배운 자가 드물었다. 그러다 원광 이후 중국으로 유학가는 이들이 뒤를 이어 끊어지지 않았으니 원광이 길을 열어주었다"고 했다.

1985년 북경의 사회과학원 보고서는 9세기경 당의 장안에는 신라인 승려, 유학생이 한때 260여 명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일본승 엔닌(圓仁'794~864)이 남긴 일기 '입당(入唐)구법순례행기'에서 그가 당에 머문 9년 동안 만나 일기에 등장하는 사람의 3분의 2가 신라인이었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세계로의 도전은 장보고 활동에서도 두드러졌다. 1995년 일본 전문가인 미국인 학자 E.O.랴이샤워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해상상업 제국의 무역왕'이라 했던 것처럼 장보고는 신라 밖 중국에서 활동하며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술 등을 활용해 해상무역을 장악했다. 골품제에 따른 불운한 신라를 벗어나 중국에서 '해상왕국'을 건설했다.

장보고를 연구한 김성훈 박사는 "장보고의 행적은 곧 우리의 해양경영사의 시작이며 대륙경영사의 축소판"이라 지적했고, 김상기 박사는 "해상왕국의 건설자"라 평가했다. 장보고의 청해진과 해상왕국 건설, 해상권 장악은 조선조 이순신 장군에게로 이어졌고, 오늘날 조선업계의 활약으로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정인열기자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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