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난다] (23)대구 경찰서와 일제징용

"똥누던 사람조차 마구잡이로 끌고가…어딜가나 젊은이 씨마를 지경"

탄광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 젊은이들은 갱목 자르는 교육부터 받았다.
탄광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 젊은이들은 갱목 자르는 교육부터 받았다.
일제강점시대 당시 대구 경찰서. 대구부의 강제 징용 책임 기관이었다.
일제강점시대 당시 대구 경찰서. 대구부의 강제 징용 책임 기관이었다.

징용자 모집을 나갔던 트럭이 대구경찰서(지금의 중부 경찰서 자리)로 돌아왔다.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건너온 노무보국회 직원들은 오늘과 내일 경북 영천과 하양, 금호 일대에서 200여 명, 모레 의성 일대에서 100여 명을 잡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들만으로는 힘에 부친다기에 대구 경찰서 순사를 넷이나 붙여 주었다. 대구경찰서 조선인 순사부장 노태영은 막 경찰서 마당으로 들어오는 트럭을 창 너머로 바라보았다.

◇젊은이라면 보이는 대로 끌고 가

보름 전 경북도청(지금의 경상감영공원) 직원이 일본 야마구치현청 소속의 시모노세키 노무지부에서 보낸 협조 공문을 가지고 왔었다. 내지(일본)에서 직접 노무자 동원 담당직원들을 파견할 테니 경북도청과 대구 경찰서에서 협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일본 내에는 더 이상 징용할 조선인이 없으며, 경상북도에서 300명을 충당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에는 없는 징용 대상자가 조선에는 널렸다는 말인가? 힘깨나 쓸 만한 젊은이라면 모조리 끌고 간 마당에 무엇을 어쩌라고.

그랬거나 말거나 이레 전에 징용자들에게 입힐 작업복과 작업모 작업화가 도착했다. 꼭 300벌이었다. 300명은 도저히 어렵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어제 점심 무렵 경북도청에 도착한 시모노세키 노무지부 직원들이 오후에 경찰서로 인사를 왔다. 말이 인사였지 인력협조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네 명이었는데 모두 따개비 모자에 누런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작지만 다부진 몸에 눈매가 매서운 사나이가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라고 씌어진 명함을 내밀며 인사했다.

"우치다 료헤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들 하셨소."

"7, 8년 만에 조선에 다시 왔는데,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발전 속도가 대단한 것 같아요."

"그런가요?"

"내선일체로 똘똘 뭉쳐서 부지런히 일한 덕분이겠지요. 아무튼 대단합니다. 오다가 보니까 소학교 학생들이 목도를 어깨에 걸치고,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는 모습이 참 씩씩했습니다. 반도의 소년 학생들도 내지 학생들 못지않게 보국노정에 열심인 것 같아 기뻤습니다. 마치 대일본제국의 승리를 미리 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전시상태이니까요."

"그렇지요. 아무튼 이번에 저희가 대구 경찰서의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시모노세키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모조리 탄광이다, 건설현장이다, 징발하다 보니 더 이상 동원할 사람이 없습니다. 동네마다 늙은이나 여자만 남아돌기 때문에 우리가 가가호호 방문할 때마다 환대를 받을 지경입니다. 케케케."

우치다는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그 표정은 교활했다. 남자들이 떠나고 없는 집을 들쑤시고 다니며 패악을 저지르는 모양이었다. 노무 동원직원들의 횡포가 심하다는 말은 진즉부터 나돌았지만 어떤 조치도 뒤따르지 않았다.

"이쪽 사정도 마찬가집니다. 어디를 가나 젊은 사람들은 씨가 말랐습니다. 징용을 시작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니까요."

태영은 노무동원이 쉽지 않을 것이므로, 목표를 조금 줄여 잡는 게 어떻겠느냐고 다시 한번 권고했다. 우치다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저희가 직접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들(우치다는 옆에 서 있는 세 사람을 가리키며)은 사람 잡는 데는 도사들입니다.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다가가서 범처럼 확 낚아채지요. 케케케."

칭찬을 들은 세 사람도 동시에 웃었다.

'미친놈들.'

밭에서 일하던 사람, 아픈 식구를 위해 약을 장만해서 돌아오던 사람,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사람들, 심지어 변소에서 똥을 누던 사람들도 끌어내 마구잡이로 쓸어오는 작자들이었다. 밭을 갈기 위해 지주의 소를 빌려 집으로 돌아오던 사내는 집에 연락도 넣지 못하고 끌려갔다고 했다. 영문을 모르는 지주는 소작인이 소를 훔쳐 달아난 것으로 알고 사람을 풀어 일대를 이 잡듯 뒤졌다고 했다. 노무직원들은 길에서 잡은 남자를 트럭에 태워 보냈고, 징발한 소는 잡아서 잔치를 벌였다고 했다. 한참 뒤에 사실을 안 지주가 항의했지만 죽고 없는 소를 살려낼 방도는 없었다. 소를 잡아먹은 노무직원들이 징계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사실 사람을 잡아들인다는 게 토끼 몰듯 무조건 쫓아다닌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겁을 주고, 때로는 회유해야 하지요. 저 멀리 무더기로 모여 있는 자들을 몇 안 되는 이쪽 사람들이 쫓아가서 잡을 수는 없지요. 괜히 어설프게 쫓아갔다가는 모두 놓치고 맙니다. 그럴 때는 한 사람이 뒷짐을 지고 슬슬 걸어가서 조사할 게 있다며 모두 불러 모은 다음 냉큼 잡아들이는 것이지요. 사람이 많으면 반항하는 놈이 꼭 있기 마련인데, 한두 놈을 시범 삼아 반 죽여 놓으면 찍소리를 하지 않는 법입니다. 제 자랑 같습니다만, 손가락 하나로 한 번에 열댓 마리를 잡아들인 적도 있었지요."

우치다는 사람을 두고 짐승을 셀 때는 쓰는 '마리'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썼다. 아무리 사람 사냥하는 일을 오래 해왔다고 해도 근본이 천박한 놈이 아니라면 그처럼 함부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태영은 언짢은 마음을 애써 눌렀다.

"아무튼 수고하십시오. 이쪽에서 트럭 세 대와 순사 네 사람을 붙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태영으로부터 인력과 트럭지원 확답을 받은 노무동원부원들은 그 길로 시내로 나가서 여관을 잡고 밤새 술을 마셨다고 했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 숙취에 시달릴 법한데도 아침 일찍 일어나 나가는 모양은 씩씩했다.

◇대구서 출발 경북 일대 샅샅이 뒤져

노무동원부원들이 자신만만하게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설마했다. 농촌에는 사람 씨가 말랐다고 했다. 그러나 과연 시모노세키에서 온 자들은 전문가였다. 경찰서로 돌아온 호송 트럭마다 붙잡힌 조선인들이 빽빽하게 들어앉아 있었다. 반항하다가 목검에 맞았던 모양인지, 머리가 터진 자, 눈썹이 찢어져 피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자도 보였다. 손가락이 부러진 자는 그 와중에 어떻게 처지를 받은 것인지 흰 광목천을 친친 감고 있었다. 웃옷이 온통 검붉은 핏물로 젖은 사람도 끼여 있었다. 트럭을 타고 함께 나갔던 순사가 들어와 보고했다.

"오늘 금호와 하양에서 104명을 잡았습니다. 내일 모레 이틀 더 작업하면 예정대로 300명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사람들은 오늘 밤 어디에서 재우나? 식사는?"

태영이 턱 끝으로 붙잡혀 온 조선인들을 가리켰다.

"경북도청의 노무직원들이 벌써 숙사를 마련해 두었다고 합니다. 대구역 뒤편에 곡물창고 두 동을 징발했는데, 거기에 몰아넣고 재운다고 합니다. 식사는 창고 측에서 준비하는데, 야간 경비는 우리더러 맡아 달라고 합니다."

"네 명 차출해서 보내 줘라."

경찰서 마당에서는 트럭에서 내린 징용자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끌려온 자들은 제각각이었지만, 회색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작업모를 씌우니 누가 누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구별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확실한 소모품이었다. 그들은 떠나온 곳이 분명했지만, 가는 곳을 몰랐고, 떠난 날이 분명했지만 돌아올 날은 정해지지 않았다. 어딘지 모를 곳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에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죽고 나면 똑같은 작업복을 걸친 또 다른 징용자들이 그 빈자리를 메울 것이었다.

"집으로 돌려보내 주지 않아도 좋소. 연락이라도 넣어 주시오. 어디로 갔다고 말이라도 전해주어야 할 것 아니오!"

태영이 막 경찰서 정문을 나서는데, 잡혀온 한 남자가 조선인 순사를 향해 조선말로 또박또박 따졌다. 노무동원부원이 달려들어 목검으로 남자의 배를 질렀다. 남자가 고꾸라지자 동원부원이 남자의 어깨와 허리를 목검으로 마구 때렸다.

"함부로 나서지 마라! 너희들 집에는 우리가 알아서 통보한다."

노무동원부원이 소리쳤다. 목검에 질리고, 두들겨 맞았던 남자는 겨우 일어나서 뒤로 물러섰다. 소란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태영은 잡혀 온 그들보다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진 남편과 자식을 기다릴 식솔들이 더 안쓰러웠다.

참담한 기분을 뿌리치기 위해 태영은 퇴근을 서둘렀다. 이런 날은 가족끼리 모여서 따뜻한 밥을 먹어야 한다. 정종이라도 한잔 걸치면 울적한 기분은 나아질 것이다. 나라 잃은 자들의 비애다. 죽음으로써 물리칠 수 없다면 복종할 수밖에 없다. 머리를 싸맨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태영이 집으로 걸어갈 때 징용자들을 태운 호송 트럭들이 곡물창고를 향해 달려갔다. 트럭에는 포장이 둘러쳐져 있었기 때문에 끌려온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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