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소년은 까만 플라스틱 판에서 나오는 그 음색이 마냥 좋았다. LP판에 바늘이 닿으면서 나는 '치익~치익~'소리에 가슴이 함께 떨렸다. 정확하게 알아듣지는 못해도 팝송 가사를 아무렇게나 흥얼거려가며 듣고 또 듣기를 반복했다. 삶이 소박했던 그 시절, 달리 놀거리나 즐길거리도 없었다. 고작해야 레코드가게나 교동 일대를 돌면서 '빽판'이라고 불리는 불법복제음반을 모으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시간이 흘러 일상에 찌들었던 그 까까머리 소년은 이제 중년이 되어 다시 그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CD에서 MP3로 음반이 진화하면서 한결 깨끗한 음색을 즐길 수 있게 됐고, 훨씬 더 편리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됐지만 아무래도 그 옛날의 'LP'의 느낌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빠르게 진화해가는 디지털 세상 속에서 '아날로그'를 찾는다는 것은 '인간미'를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갈망이 투영된 것이다. 연필로 글을 써내려갈 때의 서걱거리는 느낌처럼 LP는 따뜻한 감성까지 함께 담아낸다. 은빛을 반짝거리며 빠르게 돌아가는 CD는 매끈한 외양만큼이나 깔끔하게 정리된 소리를 내면서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을 전하지만, 검은 플라스틱판에 새겨진 홈을 뾰족한 바늘로 읽어들여 소리를 재생해 내는 LP는 투박하지만 진실된 소리를 담아낸다.
음악카페 '스쿨'을 운영하고 있는 권용한(49) 씨는 "조용한 날 LP를 틀어놓고 있으면 사람 침 넘기는 소리까지, 기타칠 때 줄 만지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다"며 LP의 매력을 이야기했다.
LP는 사람의 정성이 더해져야 비로소 제대로 된 소리를 선사한다. LP판은 조금만 보관을 잘못해도 판이 휘거나 곰팡이가 슬어 못쓰게 되기 십상인 것. 수시로 먼지를 닦아줘야 하고, 턴테이블의 바늘과 카트리지도 소중하게 관리해줘야 한다. 더군다나 MP3처럼 길을 걸으며 들을 수도 없고, 음악이 질렸다고 해서 간단한 버튼 하나로 지워버리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대구에서 LP음악 즐길 수 있는 곳
▷우드맥=2003년 2월 문을 연 곳이지만 실내 인테리어는 30년은 족히 된 분위기를 풍긴다. 벽을 가득 채운 LP재킷과 사진들은 1980년대에서 그대로 시곗바늘을 멈춰놓은 듯한 분위기다.
정효진(51) 사장은 "내 정서의 기반은 로큰롤(Rock&Roll)"이라고 밝히는 만큼 이곳의 음악은 시대를 넘나드는 다양한 록이 기반을 이루며, 그 외에도 재즈와 오래된 트로트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다. 보유하고 있는 LP장수를 묻자 정 사장은 "음악은 숫자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양보다는 질"이라고 웃었다. 그는 "음악은 내 삶 속에서 느끼는 것"이라며 "이곳을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어울릴 줄 아는 문화인들의 공간, 자유로운 영혼이 숨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가끔 정 사장이 홀로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하는 모습이나, 흥에 겨워 록 음악에 온몸을 맡기고 춤 아닌 춤을 선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경북대 정문 건너편 보은약국 골목 30m 안. 053)958-5290.
▷美술事='아름다운 술 이야기'라는 제목의 운치있는 LP바다. 그 이전부터 있었던 곳이지만 현재 주인이 자주 드나들던 단골집을 아예 인수해 2005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장소가 좁아 많은 인원이 들어갈 수는 없지만 그만큼 사람과 부대끼는 '맛'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주인 양헌규(36) 씨는 아직도 새롭게 발매되는 LP는 꼬박꼬박 사모으는 음악 마니아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LP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외국에서는 아직도 신보(새로 취입한 음반)를 LP로 발매하는 경우가 꽤 있어 해외주문을 통해 손에 넣고 있다"고 했다. 그가 LP바를 운영하고 있는 만큼 주위 친구들 역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여들다보니 일본에서 음반을 구해다주는 인맥도 갖고 있다. 대구시 중구 삼덕동 관음사 골목에 있다. 053)424-0803.
▷민들레창고=중구 대봉동 대봉도서관이 있는 골목길, 청운맨션 후문 건너편에 있다. 간판도 없이 창문에 조그많게 '민들레창고'라고 쓰여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실내 인테리어는 사장님의 손때가 곳곳에 묻어 있는 정감 넘치는 풍경이다. 단골들의 사진이 벽 가득 붙어 있다. 의자는 옛날 초등학교 교실에서 옮겨온 것 같은 나무재질이라 조금 불편할 수 있지만 LP음악과 함께 추억여행을 떠나는 데는 제격이다. 틀어주는 음악은 클래식, 재즈, 포크송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흔히 대다수 LP바가 록, 올드팝 장르에 치중돼 있는 반면, 이곳에서는 클래식 음반을 꽤 보유하고 있고 이를 즐겨듣는 단골들이 많다. 사장 김정현(45) 씨는 "민들레처럼 강인한 생명력 넘치는 공간이 되라는 의미에서 '민들레창고'라는 이름을 붙였다"며 "좁은 공간이지만 사람들에게 민들레 홀씨처럼 퍼지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공간으로 커 나가길 바란다"고 했다. 070)8114-7891.
▷LP카페 시선2=북구 고성동 푸르지오 아파트 맞은편, 2층에 있다. 깔끔하고 정갈한 인테리어다. 현재 이곳을 운영 중인 전진수(37) 사장은 한 달 전 이곳을 인수했다. 약 2천여 장의 음반을 보유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어떤 음악이 있는지 속속들이 파악이 되지 않아 '공부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듣고 있다고 했다. 쾅쾅 울리게 음악을 트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담스럽지 않게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전 사장은 "친구들과의 모임장소로도 애용되지만 혼자 가볍게 맥주나 양주 한잔을 즐기면서 추억에 잠기려는 분들도 꽤 많다"고 했다. 053)353-1980.
▷스쿨=수성구 두산동 수성유원지 인근에 있다. '음악카페'로 상당한 명성을 얻은 곳으로 2층 구조로 돼 있어 제법 규모가 크다. 얼핏 세련된 인테리어가 강점으로 보이지만, 사실 알고보면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어느 곳보다 편안한 분위기를 자랑한다. 앉아서만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서서 흔들흔들 박자를 맞추는 사람, 아예 춤에 빠져든 사람까지 음악을 즐기는 법도 제각각이다. 이곳은 처음 신촌블루스 보컬이었던 고 김형철 씨가 운영했던 라이브 카페였지만 지금은 LP를 중심으로 한 음악카페로 바뀌었다. 권용한 사장은 중학교 때부터 모은 2천500장의 LP와 1천300장의 CD를 통해 세대를 뛰어넘은 음악을 들려준다. 그는 "외국의 펍(pub)처럼 아버지와 아들, 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세대를 뛰어넘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며 "이 때문에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나는 가수다'음악에서부터 심지어 국악을 틀기도 하는 등 시대와 장르를 가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053)764-1969.
◆대구지역 중고 LP전문점
▷레코드매니아(www.recordmania.co.kr)=중저가 LP가 다양하게 구비돼 있다. 프린스호텔 뒤편 좁은 골목길을 따라 명덕네거리방향으로 2블록을 가다보면 신토불이 한정식 지하에 있다. 간판은 없으며 지하로 내려가는 유리문 입구에 '레코드매니아'라고 작게 써 있어 놓치기 쉽다. 053)654-7175.
▷레코디안(www.recordian.com)=희귀 LP를 전문적으로 취급한다. 매장은 파티마병원 뒤편. 동부도서관 가는 골목길로 따라 올라가다 신암공원이 보이는 네거리 모퉁이에 있다. 간판이 없어 매장을 방문하려면 전화로 위치를 물어가며 찾아가야 한다. 053)939-9396.
▷월드레코드(www.worldrecord.co.kr)=클래식 음반이 많다. 대구 남부정류장에서 경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대륜고 가기 전 우측 편으로 우방금탑아파트 가는 골목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500m쯤 가면 찾을 수 있다. 낮에는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아 오후 7시 이후에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 053)742-0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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