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산이수(三山二水)의 명당'.
팔공산, 일월산, 속리산 등 세 산이 모이고, 낙동강과 위천(胃川)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상주시 중동면 우물1리 우무실.
팔공산이 지맥을 북쪽으로 이어가다 위천으로 인해 더 나가지 못하고 높이 솟은 토봉. 속리산에서 뻗어나와 상주 낙동면에서 낙동강과 어우러져 솟아있는 나각산. 일월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우뚝 솟은 비봉산.
우무실은 바로 토봉이 동쪽에서, 낙동강 건너 나각산이 서쪽에서, 비봉산이 북쪽에서 각각 내려다보고, 낙동강과 위천이 각각 서쪽과 남쪽에서 에워싼 '삼산이수'의 터전이다.
중동면 우물1리는 큰마 또는 본동으로 불린 대표적인 '우무실'을 비롯해 작은마로 불리는 '가실(가사리) 또는 우천' '범갈미' '샙디' 등 4개의 자연마을로 이뤄졌다. 우무실을 동쪽에서 감싸 안은 토봉에는 우물2리 '솥골'이 자리하고 있다.
당초 50여 가구로 큰마였던 우무실은 2006년 상주 낙동사격장 비행안전구역으로 편입돼 상당수가 보상을 받고 외지로 떠나 20여 가구만 큰마에서 범갈미로 옮겼다. 큰마의 우무실은 거의 사라지고 범갈미가 우무실로 바뀐 셈이다. '우물' '우무실' '우천'은 모두 위천가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가실'은 마을 개척 당시 가시덩굴이 우거져 '가시리'로 불리다 이후 선비(士)가 많이 배출돼 '가사리'로 바뀌었다. '범갈미'는 옛날 호랑이가 숨어 있었다고, '샙디'는 낙동강과 위천 사이에 있다고 각각 붙여진 이름이다.
남원 양씨와 풍산 류씨가 차례로 들어와 터전을 가꿨고, 조선 선비들이 삼산이수가 만들어낸 절경을 맛보며 풍류를 즐겼던 마을이다. 우무실 사람들은 지금 옛 본동에서 호랑이가 살았다는 범갈미로 옮겨 대다수 소를 키우며 새 터전을 가꾸고 있다.
◆양 처사, 우무실에 뿌리내리다
양세룡(梁世龍)은 남원 양씨다. 19세에 경기도 김포에서 통정대부를 지냈다. 젊은 나이에 큰 뜻을 품고 일했다. 그러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젊은 선비 양세룡은 의병을 모았다. 부산에서 내륙으로 치고 올라오는 왜군을 맞아 대항했다. 그러나 병력 수와 전투 장비에서 역부족이었다. 결국 후퇴하며 도망했다. 전쟁의 화를 피해 피신한 곳이 바로 낙동강변 우무실마을이었다. 양세룡은 죄책감에 굴 안으로 들어갔다. 낙동강과 위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능선 봉황성 옆 절벽의 한 굴에서 숨어 살았다.
임진왜란은 끝났지만 양세룡은 다시 벼슬길로 나가지 않았다. 관직을 떠나 우무실에 둥지를 틀었다. 한평생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며 살았다. 그것이 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우지 못하고 후퇴한 선비의 선택이었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은둔한 선비라고 양 처사(處士)로 불렸다. 양 처사는 바로 우무실마을의 입향조(入鄕祖)이다. 양 처사가 임란 당시 마을에 터를 잡았기에 우무실마을이 형성된 것은 약 420년이 된 셈이다.
세월이 흘러 양 처사의 남원 양씨 후손들은 1965년 그의 공적을 기려 낙동강 절벽 위에 양처사비와 비각을 세웠다. 절벽 인근에는 양처사굴도 남아 있다.
양승택(55) 씨는 "우리 양가의 웃대 할아버지가 임진왜란 때 싸우다 낙동강변 벼랑 끝 굴 안에서 피신을 했는데, 우리는 양처사굴이라고 카는데. 임진왜란 뒤 여기 (마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아가지고 살았는기라"라고 말했다.
양정웅(72) 씨는 "그 할아버지(양세룡 처사) 아들이 손자가 서(셋)이라. 종파, 중파, 기파 이래 삼파에서 돈을 거뒀지. 양처사굴 근처에 비각을 세웠는기라"라고 했다.
◆수암, 집안을 더 융성시키다
남원 양씨 다음으로 우무실에 터를 잡은 성씨는 풍산 류씨다. 서애 류성룡의 셋째 아들 수암 류진(1582~1636)은 36세인 1617년 분가를 위해 안동 하회마을에서 이곳 우물리 가실(가사리:佳士里)로 옮겨왔다.
류기우(58) 씨는 "류성룡 할아부지의 셋째 아드님이거든 우리 수암 할아버지가. 셋째 아드님이 거서(하회마을) 세간 나야 될 거 아니라. 한 집에 다 못 살잖아. 인제 명당 찾아 온기라. 상주에 아는 사람들도 많고 그래서, 특히 우복 정경세 선생이 여기 추천을 마이 해갖고 그래 가사리로 왔거든"이라고 했다.
수암이 가사리의 허술한 초가에 터를 잡은 지 100여 년 뒤 지금 수암종택이 있는 우무실로 집터를 옮겼다. 이 자리가 바로 풍산 류씨 우천파의 종택인 수암종택이다. 강고 류심춘(1762~1834), 낙파 류후조(1798~1875), 계당 류주목(1813~1872) 등 쟁쟁한 유학자들이 바로 수암종택에서 태어나 퇴계학을 계승하며 풍산 류씨 가문의 세력을 높였다. 수암종택은 수암의 7대손인 낙파에 의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수암의 후손들은 바로 우무실 일대를 일컫는 '우천'에서 둥지를 틀면서 풍산 류씨 우천파가 됐다.
양승택 씨는 남원 양씨에 이어 풍산 류씨가 터를 잡은 뒤 가문이 융성하게 된 계기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을 내놓았다.
"옛날 우리 양가 어른이 초가로 터를 잡아 살았는데 불이 나 한 번 다 태우고, 또 두 번째 다 태웠는거라. 세 번째 살라고 준비를 하는 과정에 한 스님이 지나가면서 '여기 이 터에는 불이 세 번이 나야 유명한 터가 되고 유명한 인물이 난다'고 했어. 그런데 두 번 불나고 나니 먹을 거도 없고 죽을 지경이었지. 그래 가지고 나가고, 그 자리에 류씨네들이 들어와 터를 잡았는 거지."
양승택 씨에 따르면 남원 양씨가 자리 잡은 뒤 불이 두 번 난 자리에 풍산 류씨가 터를 잡으면서 류씨 가문에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나오게 됐다는 것이다.
류기우 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남원) 양씨네가 터를 잡았는데 집이 무너지고 불나고 하니까 고마 나가부렸어. 맹 뭐 전설이지만. 그 뒤에 우리(풍산 류씨)가 들어와 갖고 집을 지으니까 두 번인가 세 번인가 무너지고 그랬대. 그래 또 짓고 또 짓고 하니까, (수암)할배한테 꿈에 노인이 나타나 '내가 니한테 졌으니까 집을 지라' 그래가지고 집을 제대로 지었고, 그때부터 잘 됐지."
◆이수(二水), 비경을 만들어내다
우무실에는 낙동강과 위천이 빚어낸 절경 때문에 예부터 정자와 대(臺)가 많이 만들어졌다.
우무실 낙동강변에 백인대와 천인대, 낙동강과 위천 합류지점에 합수대와 합강정, 용바위와 용바위소 등 숱한 절경을 뿌려놓았다. 합강정 외에 송암정과 독송정 터도 있다. 우무실 사람들은 물댕이나루, 샙디나루, 솥골나루를 통해 배를 타고 이 절경을 감상하곤 했다고 한다.
낙동강이 남류하다 우무실 위천을 만나기 직전 절벽을 이루고 있는 천인대(天人臺). '하늘과 사람이 맞닿는 벼랑'이다. 석천 김각(1536~1610)이 1600년 전후 터를 닦아 건립했다. 강고 류심춘은 낙동강 절경을 굽어보면서 '푸른 병풍 하늘 반을 드리웠네/ 중간에 바람도 급히 지나가/ 높은 곳 새 날기도 위태롭네/…/ 늙은 신선이 달빛에 서 있는 형상일세/….'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위천이 서쪽 낙동강으로 들어가는 절벽 위에는 석천의 아들 김지덕이 합수대 터를 닦고 정자(합강정:合江亭)를 지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처럼 낙동강과 위천이 만들어낸 우무실은 삼산이수의 절경을 뽐내고, 이 절경을 벗 삼아 풍류를 읊었던 선비들의 고향이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김수정'이가영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권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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