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필름통] 전쟁과 여성의 잔혹사 '그을린'

사실 전쟁은 여성의 수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인은 자신을 지키는 총이라도 있지, 여성은 숨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특히 인종적, 종교적인 전쟁이라면 여성에게는 더욱 가혹한 시련이 닥친다.

후투족과 투치족의 르완다 내전에서는 종족의 씨를 뿌리기 위해 상대 종족 여성 포로로 강간캠프가 성행하기도 했다. 90년대 보스니아 내전에서는 저격수들이 상대편 아이들만 골라 쏘기도 했고, 임신부를 쏘면 '원 샷 투 킬'(총 한 발로 둘을 죽이는 것)이라며 환호를 했다.

캐나다의 재능 있는 감독 드니 빌뇌브의 '그을린'(2010년'사진)은 중동 내전으로 고통받는 한 여인의 잔혹사를 그린 영화다. 관객의 혼을 빼놓는 뛰어난 연출력으로 인간성이 실종된 현장이라는 깊이 있는 주제를 그렸다.

캐나다의 한 어머니가 숨을 거두며 쌍둥이 남매에게 유서를 남긴다. 딸에게는 아빠를, 아들에게는 형을 찾아 전하라며 두 통의 편지를 남긴다. 아빠는 죽었고, 형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남매는 의아해하지만 엄마의 유언에 따라 중동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상상할 수 없는 엄마의 비밀과 함께 잔혹한 중동의 역사와 마주한다.

'그을린'은 와디 무와드의 연극을 각색한 영화다. 영화 속에서는 가상의 국가가 나오지만, 이 국가가 레바논이라는 것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70년대 초 레바논은 기독교계 정부가 집권했지만, 당시 요르단에서 온 무슬림들이 남부에 난민캠프를 형성하면서 종교적 갈등을 빚었다. 급기야 상대 주민들을 학살하는 악순환이 계속됐고, 결국 내전으로 확전됐다.

주인공 나왈 마르완(루브나 아자발)은 기독교인이면서 무슬림 남자친구와 함께 도망치다가 오빠들에게 붙잡힌다. 눈앞에서 남자친구가 무참히 살해당하고 자신도 가문의 명예에 먹칠했다며 죽임을 당할 위기에서 엄마가 나타나 겨우 목숨을 건진다.

기독교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가진 그녀는 이후 민병대장을 살해하면서 혹독한 감옥생활을 겪는다. 이후 벌어지는 일들은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포옹한다. 반목과 질시, 가혹한 시련과 처절한 운명마저 끌어안으며 모성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위대한 휴머니즘을 보여준다.

일본의 99세 할머니 시인 시바타 도요는 '있잖아, 불행하다고/한숨 짓지마/…/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살아 있어 좋았어/너도 약해지지마'('약해 지지마')라고 했다.

'그을린'의 어머니가 남긴 유언과 너무나 흡사하다. 태어나서 좋았고, 함께해서 좋았고, 살아 있어 좋은 것. 그것은 사랑이었다.

김중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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