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상 대대로 '나눔 실천' 가풍…송석환 동진기업 회장

정리해고·사오정 없는 회사 일궈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뜻한다. 우리말로는 '솔선수범' 정도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 서구적 문화가 관심을 받게 된 과정은 다소 역설적이다. 우리 사회 지도층들이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데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부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주 출신인 송석환(67) 동진기업 회장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아주 익숙하다. 조상 대대로 나눔을 실천해 온 가풍이 몸에 밴 때문이다. 송 회장의 선친인 고(故) 송주식은 1949년 3월 농지 개혁에 앞서 집안 소유의 농지 500두락(斗落'약 3만3천㎡)을 소작농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줬다. 현재 시세로는 40억원에 이르는 큰돈이다. 당시 신문들도 송 회장 집안의 선행을 '농지를 분여한 지주들의 미거(美擧)'로 기록했다.

또 맨손으로 집안을 일군 그의 증조부는 춘궁기에 기미(飢米)를 풀어 마을 주민들을 평안하게 했다고 한다. 조부인 송돈호 역시 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 양성을 위해 설립됐던 김천고 설립 과정에 많은 사재를 출연했다. 송 회장도 이 학교 출신으로 매년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경주(慶州)에 최 부자 가문이 있었다면 상주(尙州)에는 송 회장 집안이 있었던 셈이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은 송 회장이 아주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한국전쟁 중 부친이 행방불명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지난 1월 경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고택(여산 송씨 정가공파)을 제외하면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형편이 넉넉했던 시절 지어진 집안 곳곳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기와에 비가 새는 등 옛 모습을 잃어갔습니다. 나중에 꼭 큰돈을 벌어 집안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다짐을 당시부터 했지요."

송 대표의 학창시절은 동년배들과 비슷했다. 하루 12㎞를 걸으며 6년 동안 김천으로 통학했다. 첫 기차를 타고 등교하고 마지막 기차로 귀가하는 식이었다. 송 회장은 하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친구들을 생각하면 그나마 저는 행복했던 편"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송 회장은 1968년 대학을 졸업한 후 외국계 자동차 제조회사에 취업,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무렵 자동차부품 국산화 과정에 참여하며 기계공학 분야에도 눈을 뜨게 됐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놨다. 송 회장은 이때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1975년 합성수지 회사(동양플라스틱 공업사)를 차리고 사업을 시작했다. 공업제품이 귀하던 시절이라 합성수지 공장은 대박을 터뜨렸고, 산업화가 급진전되면서 수요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규모는 비교할 수 없지만 포항제철소가 철이라는 원자재를 우리 산업 전반에 제공했다면 저희 회사는 주로 장판, 비닐, 식품포장용기 등에 사용되는 합성수지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현재 미국과 중국의 현지 공장을 바탕으로 세계무대에서도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치고 위기를 겪지 않은 이가 있을까. 송 회장도 큰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1980년대 중반 노사 분규로 곤욕을 치렀는가 하면 1998년 외환위기 당시에는 납품대금 수백억원을 떼이기도 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몸이 망가지기도 했다.

송 회장이 위기를 극복하면서 깨달은 것은 어려울수록 곁에 있는 사람들과 뭉쳐야 한다는 진리였다. 국내외 5개 사업장(직원 400여 명)으로 구성된 동진기업에는 '정리해고' '사오정'(45세 정년)이라는 단어가 없다. 평생직장 모델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송 회장은 요즘도 고향을 자주 찾는다. 고향 인근인 김천에 생산공장이 가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송 회장은 "이곳저곳 기웃거리지 않고 합성수지 개발에만 37년을 쏟아부은 덕분에 이제 제법 기술력도 인정받고 회사도 자리를 잡았다"며 "그동안 함께 노력해준 사원들과 성원해 주신 분들을 위해 봉사하며 여생을 보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장성한 3형제에게 기업 운영을 맡긴 송 회장이 요즘 가장 정성을 들이는 일은 모교의 중흥이다. 지난 3년여 동안 송설동창회장(김천중·고)을 맡아온 데 이어 16일에는 송설당교육재단 이사장에 취임한다. 송 회장은 상주 오광초, 김천중·고와 동국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유광준기자 jun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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