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에게,
벌써 2년이 훌쩍 지났구나. 네가 세상과 이별했다는 소식은 2009년 3월 어느 날 애처로운 목련처럼 나에게 전해졌다. 삼라만상이 깊게 잠든 겨울 막바지에, 이른 새벽 성급히 꽃잎을 터뜨리려다가 꽃샘추위에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그리운 얼굴 더 이상 가슴에 담아 두지 못해 순백의 자태를 수줍게 드러내는 목련처럼, 한동안 소식 없던 네가 암 투병 중이라는 아픈 소식을 전해 들은 지 1년 만에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어.
2003년, 돈도 사람도 없는 척박한 대구에서 환경운동을 한답시고 독립운동하듯 뛰어다니기를 10년, 나는 마지막 남은 진까지 시민운동에 다 쏟은 뒤 재충전을 위해 낯선 이국땅, 필리핀으로 1년간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너를 만났지. 환경운동단체 후배 활동가였던 너는 영락없는 부산 가시내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모임 뒤 필수 코스인 뒤풀이에서 너는 건배할 때마다 단숨에 술잔을 비웠고, 어느 정도 술이 돌아 분위기가 산만해질 듯하면 우렁찬 목소리로 "이것들이! 선배님 계신데, 집중! 집중!" 하면서 장내를 정리하곤 했었다. 어느 자리에서나 선배 대접을 깍듯이 했던 너는 그 당시 운동판에서는 보기 드문 착한(?) 후배였다. 너는 매우 열정적으로 대화를 했어. 연설하듯 큰 목소리와 몸짓을 섞어가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때면 마치 영국군을 무찌르기 위해 흰 갑주에 흰 옷을 입고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잔 다르크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가냘픈 너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던 강력한 기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했었다.
썬이라는 닉네임은 너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적도 가까이 위치하여 연중 덥고 태양빛이 매우 강렬한 필리핀 기후에 걸맞기도 했지만 기후만큼 뜨거운 열정을 지닌 너의 모습에 꼭 맞는 이름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여러 시민단체의 힘으로 설립한 필리핀 아시아 엔지오 센터의 1기 연수생으로 너와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음주를 즐겼던 나에게 거의 매일 이어졌던 필리핀의 밤은 항상 아쉬움이 남는 축제의 시간이었다. 경향 각지에서 온 멤버들과의 술자리에 세계 5대 맥주에 든다는 산미구엘 병이 수북이 쌓이면 너는 어김없이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열창했었지. "헤일~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흥겨우면서도 구수하고, 끊어질 듯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너의 노래는 듣는 사람의 가슴을 파고들어 좌중을 숙연하게 만들곤 했지. 마파야파, 비에프홈, 레드하우스, 깔라라얀, 마닐라베이, 민도로, 민다나오, 팔라완까지, 마치 우리 멤버들은 호랑이가 자기 영역을 표시하듯이 필리핀 곳곳에 우리의 흔적을 남기기를 주저하지 않았지. 그때 우리는 정말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었다. 자신을 옥죄고 있던 온갖 가식과 형식을 떨쳐 버리고 진정한 운동가로, 세계의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넌 먼저 귀국해 환경운동 현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 소식을 들었다. 어쩌면 너는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 먼 길을 돌아왔는지 모른다. 그 사람과 너는 참 행복을 느끼며 살았을 거야. 왜냐하면 너는 운동을 향한 뜨거운 열정,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유를 향한 끝없는 갈망으로 뭉쳐 있어 스스로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출산 소식을 접했을 때가 가장 기뻤다. 아마 너를 닮았다면 커서 인기몰이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혼자서 빙긋 미소 지으며 좋아했었단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너의 개인적인 행복은 채 몇 년을 넘기지 못했구나. 아마 신마저 너의 전쟁 같은 사랑을 질투한 결과일 거야.
마지막 가는 길 배웅하지 못해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이 글을 읽고 짧지만 참하고 아름답게 살다간 너의 삶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너를 기억하는 것으로 그 무거움을 내려놓으련다. 그리고 이 땅에 머무는 동안 네가 남긴 자연과 생명에 대한 열정, 사랑, 그리고 자유가 확장될 수 있도록 더욱 애쓰겠다는 말로 작별 인사를 하마. 썬, 편히 쉬시게.
문창식(간디문화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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