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출향인사] 안종식 뉴패션 그룹 회장

派獨 청년광부, 미국 최대 청바지 기업 일구다

소년은 늘 수평선 너머를 동경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바닷가였기도 했지만 팍팍한 현실이 그를 꿈꾸게 만들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조차 그에게는 넘어서야 할 벽으로 다가왔다. 누군가에게는 낭만으로만 남았겠지만.

소년의 인생에도 고비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버텼고 끝내 태평양 건너에서 성공을 거머쥐었다. 파독((派獨)) 광부 출신으로 미국 최대의 청바지 전문 의류기업을 일군 안종식(72) 뉴패션 그룹 회장은 삶은 '도전과 응전의 연속' 그 자체였다.

그는 포항에서 태어났다. 지금이야 세계 굴지의 철강회사가 자리잡은 산업도시이지만 해방 직후에는 가난한 어촌에 불과했다. 그의 아버지도 동빈항에서 누구보다 많은 땀을 흘렸지만 수입은 보잘것없었다. "학교 등록금을 제때 내지 못하는 일이 잦을 정도였지요. 결국 포항중 1학년 때 쫓겨나다시피 학교를 그만둬야했습니다. 창피한 마음에 다니던 교회에도 발길을 끊었죠. 길에서 아는 친구들이 멀리 보이면 골목으로 숨기 바빴습니다. 허허허."

우여곡절 끝에 포항 동지중을 졸업한 그는 동지상고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내 포항수산고(현 포항해양과학고)로 옮겼다. 배를 탔던 아버지의 영향도 컸지만 바다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5남매의 맏이였던 까닭에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직장에 갈 실력은 없었고, 배를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직도 이루진 못했지만 제 평생의 꿈도 어선의 선주가 되는 겁니다."

그의 인생이 180도 바뀐 건 1965년이었다. 고학을 하며 다녔던 성균관대 야간부 경제학과를 중퇴한 뒤 고향에 내려와 있던 그에게 독일에 갈 광부를 모집한다는 뉴스는 반갑기 그지없는 단비였다. "짧은 교육을 받은 뒤 독일 가는 비행기에 올랐는데 포항 상공을 지나가더군요. 그때 본 고향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은 세계 어디에 가도 볼 수 없었습니다."

당초 3년 계약으로 아헨 근처에 있는 석탄광산에 취직했지만 2년 만에 그만둬야 했다. 석탄 경기가 나빠지면서 회사가 무급휴직을 실시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도전에 나서야 했다. "유럽보다 미국이 조금 경제가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미국행을 결정했습니다. 군대도 카투사를 다녀와서 미국에 대한 호기심도 많았고요. 문제는 돈이었죠."

1967년 어느 봄날, 뉴욕에 도착했지만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주머니에는 200달러밖에 없었다. 무작정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사흘 내도록 버스만 타고 LA로 갔습니다. 거기에서도 일자리를 못 구하면 배 타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요. 서부개척시대에는 금광을 찾아 서부로 갔지만 저는 고향이 가깝다는 이유로 LA를 택했지요."

미국 생활은 쉽지않았다. 주변의 주선으로 페인트공으로 처음 달러를 번 뒤 온갖 궂은일을 다 거쳤다. 파이프공장, 자동차정비소에서 일하기도 했고, LA공항에서도 근무했다. 정비소도 직접 차렸지만 2년만에 망했다.

봉제업에 뛰어든 것은 1974년. 청바지의 바느질작업 하청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기술을 개발하고 신용을 쌓았더니 사업이 궤도에 오르더군요. 간호사로 독일에 왔다가 저를 만난 아내가 큰 힘이 되어줬죠. 늘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처음 직원 20명으로 시작한 그의 회사는 지금 멕시코 공장 800명, 미국 공장 170명으로 커졌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브랜드 16곳의 청바지를 OEM 방식으로 월 18만 벌씩 만든다. 연매출액도 4천만달러에 이른다. 치과의사를 하던 아들이 9'11사건 이후 경영에 참여하면서부터는 자체 브랜드도 개발, 인기리에 판매하고 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지난해 4월, 한국광물자원공사의 사외이사를 맡으면서부터이다. 그동안의 글로벌 비즈니스 경험을 살려 고국에 마지막 봉사를 하기위해서였다.

"경제 성장으로 해외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우리는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아요. 다른 사람을 배려해주는 에티켓도 부족하고, 자기 목소리만 높이는 것도 고쳐야 합니다. 젊은층이 안정만 추구할 게 아니라 모험심을 가질 필요도 있어요."

그는 국내 농어촌 어린이들의 미국 단기 연수도 추진하고 있다. 그가 회장을 지냈던 '미주녹색실천연합'을 통해서다.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싶어요. 저 역시 꿈이 없었더라면 이 자리에 설 수 없었겠죠. Boys, Be ambitious!"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