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혼] 제3부-선비정신 1>선비의 고장 경북

조선 건국 관학파도, 고려에 충심 절의파도…중심은 경북인이었다

최초의 주자학자인 안향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영주 소수서원 입구 노송 숲을 걸어가는 선비. 만고에 푸르른 소나무와 지조와 절개의 상징인 선비의 모습이 하나가 되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최초의 주자학자인 안향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영주 소수서원 입구 노송 숲을 걸어가는 선비. 만고에 푸르른 소나무와 지조와 절개의 상징인 선비의 모습이 하나가 되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회헌 안향의 초상화 퇴계 이황의 초상화
회헌 안향의 초상화 퇴계 이황의 초상화
소수서원 내부 전경. 문화유산해설사(왼쪽)가 서원에 얽힌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소수서원 내부 전경. 문화유산해설사(왼쪽)가 서원에 얽힌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선비가 추구하는 삶의 최고 목표는 자신의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학자들은 어릴 때부터 철저한 인격 수련과 학문 연마의 과정을 거쳤다. 성인이 되면 과거를 통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이 배운 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했고, 또 벼슬에서 물러나면 향촌으로 돌아가 후학들을 양성하며 학문을 정리하는 일에 전념했다. 선비라면 이 모든 과정을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회적인 책무로 여겼다.'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에 전시된 '유학자의 일생'이란 글귀이다.

경북은 선비문화의 핵심적인 가치를 창출하고 유지해온 지역이다. 경상도 선비집단은 오랜 역사적 흐름 속에서 형성되었다. 선비의 개념이 유학(儒學)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듯이, 고려 무신정권 이후 특히 경상도 지역을 기반으로 등장한 신흥 사대부계층이 채택한 학문은 신유학 즉 성리학(性理學)이었다.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원(元)나라가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신유학을 가장 먼저 도입한 인물은 경북 영주 순흥 출신인 회헌(晦軒) 안향(安珦)이었다.

안향은 내우외환으로 흔들리는 고려왕조의 통치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 주자학을 들여와 후학들에게 전했고, 그들이 후일 조선왕조 개창의 주역이 되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면서 영남 사림파를 태동시키기도 했다.

안향은 권부(權溥) 백이정(白頤正) 우탁(禹倬) 등 문하에 6군자(君子)를 뒀는데 대다수가 경북인이었다. 안향과 백이정의 학통은 권부의 사위로 경주 출신인 이제현(李齊賢)에게 이어지며 이곡(李穀)'이색(李穡) 부자를 거쳐 영천 출신 정몽주(鄭夢周)에 이른다. 정도전'하륜'변계량 등 당대의 유학자들도 모두 이색의 학통이다.

목은(牧隱) 이색의 문인인 포은(圃隱) 정몽주의 제자가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야은(冶隱) 길재(吉再)이다. 그런데 권근은 정도전'변계량 등과 함께 조선 개국에 동참하는 관학파를 형성했으며, 길재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과 성리학에 기초한 후진 양성은 영남 사림파의 정신적인 토양이 되었다. 그래서 16세기 후반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이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 계보도가 형성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김성우 대구한의대 교수는 "여말선초의 왕조 교체기에 구체제 옹호론이나 신체제 개혁론 양대 진영의 핵심 사상가들 대부분이 영남 출신 사대부였다"며 "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의 상반된 행보가 그 극명한 사례"라고 지적했다.

구미 금오산 기슭에 은거하던 길재를 찾아 수학한 김숙자(金叔滋)는 아들 김종직(金宗直)에게 학문을 잇게 했다. 부모상을 당해 고향에 머물던 김종직은 청년 김굉필(金宏弼)을 만나 소학을 가르치며 사제관계가 되었고, 김굉필의 유배지인 평안도 희천을 찾은 조광조(趙光祖)는 기호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정붕(鄭鵬)과 박영(朴英)을 거친 김종직'김굉필의 학통은 박영과 교우관계이던 이언적(李彦迪)과도 학문적인 사승관계를 형성하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커다란 학문적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도학적 이념과 이상을 갖춘 경북의 선비가 등장한 것은 16세기 퇴계학파가 출현하면서다. 퇴계 이황은 중국에서 발아한 보편이론으로서의 성리학을 조선 사회의 특수성에 맞게 재구성하기 위한 시도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선학(先學)에 대한 매서운 비판과 선배 유학자들에 대한 냉철한 평가도 마다하지 않았다.

퇴계는 주자학을 시대정신으로 삼으면서 이를 사화로 얼룩진 16세기 조선의 상황에 창조적으로 변용했다. 기대승과 조목(趙穆)의 이름도 거론되지만, 퇴계 학통을 사실상 양분한 인물은 김성일(金誠一)과 류성룡(柳成龍)이다.

학봉의 학맥은 장흥효(張興孝), 이현일(李玄逸), 이상정(李象靖)을 거쳐 류치명(柳致明)에 이르러 정재학단을 형성하며, 김흥락(金興洛), 이상룡(李相龍) 등에 이르면서 영남의 전지역을 아우르는 가장 강력한 학문집단으로 성장했다. 후일 위정척사운동의 배경이 된다.

서애 류성룡의 학맥은 정경세(鄭經世) 류진(柳袗) 류원지(柳元之),정종로(鄭宗魯) 등으로 계승된다. 19세기 들어 역시 퇴계학파인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이진상(李震相)이 한주학단을 일으켜 이승희(李承熙), 이병헌(李炳憲) 등에게 이어지며 일제강점기 때 파리장서사건을 주도한다.

정순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달 3일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열린 경북의 정체성 토론 국제포럼에서 '선비정신과 경북인의 삶'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이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학단을 형성하면서 퇴계학의 계보가 안정적으로 구축되었다"며 "이로 인해 퇴계의 주리철학과 예론을 향촌사회에 착근시키고 내재화하는 독특한 선비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퇴계의 문도 중에는 학봉과 서애라는 양대 학맥 외에도 정구를 중심으로 한 학맥도 자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초의 통일 왕국을 건설한 신라에 이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비록 진퇴와 부침을 거듭했지만 경북인은 늘 국정운영의 중심에 있었다. 고려 후기에 주자학을 도입한 것도 경북인이요, 새로운 조선 건국에 앞장선 관학파도, 기울어가는 고려 왕조에 충심을 다한 절의파도 모두가 경북인이었다. 노진환 유교문화진흥원장의 말마따나 요즈음 정치적 용어로 말하자면 '여당의 실세도 야당의 주역도 모두 경북인'이었다는 것이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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