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모든 곳에 '밥그릇 이기주의'…기득권 때문에 한국 사회 병든다

약사회 반발로 일반의약품 약국 외 판매가 한차례 무산됐다. 밤이 되면 대부분의 약국이 문을 닫아 연고 하나도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약사회 반발로 일반의약품 약국 외 판매가 한차례 무산됐다. 밤이 되면 대부분의 약국이 문을 닫아 연고 하나도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대한약사회는 심야당번약국을 확대해 의약품 구입 불편을 해소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심야당번약국제도가 있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 사진은 대구 중구 향촌동에 있는 심야응급약국.
대한약사회는 심야당번약국을 확대해 의약품 구입 불편을 해소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심야당번약국제도가 있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 사진은 대구 중구 향촌동에 있는 심야응급약국.

최근 이진수(43'대구시 남구 이천동) 씨는 문 열린 약국을 찾기 위해 차를 몰고 1시간 동안 밤 거리를 헤맸다. 장난감을 갖고 놀던 딸(5) 아이가 손을 베는 바람에 연고를 사기 위해 이 씨가 집을 나선 시간은 밤 10시. 동네 일대를 돌았지만 모든 약국은 문이 닫혀 있었다. 할 수 없이 대로를 따라 명덕네거리로 나간 이 씨는 영대네거리 방향으로 차를 몰며 문 열린 약국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특히 대학병원이 있어 약국이 많은 영대네거리 인근에서는 약을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오산이었다. 그는 안지랑네거리를 지나 서부정류장까지 차를 몰며 대로변 약국을 하나씩 살펴보았지만 영업하는 약국은 찾을 수 없었다. 연고 사는 것을 포기하고 차를 돌려 집으로 향하던 이 씨는 대형소매점 앞을 지나다 약국이 입점해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겨우 연고를 구입했다. 이 씨는 "밤에는 연고 하나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국민 편의를 위해 일반의약품의 슈퍼 판매가 하루빨리 시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추진하던 일반의약품의 약국 외 판매가 한차례 무산됐다. 대한약사회가 의약품 오남용 가능성을 제기하며 강력하게 반발했기 때문. 하지만 대한의사협회는 일반의약품의 경우 약국 외 판매를 하더라도 안정성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대한약사회가 '밥그릇'(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민 편의를 볼모로 잡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국민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보건복지부는 대통령의 질책을 받고 44개 종류의 약을 '슈퍼용'(의약외품)으로 전환해 오는 8월부터 슈퍼마켓에서 살 수 있도록 했다.일반의약품 약국 외 판매 논란을 계기로 한국의 기득권 문화를 조명했다.

◆기득권 한국 사회 발목을 잡다

기득권 때문에 우리 사회가 병들고 있다. 국가 정책이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의약품 약국 외 판매가 보류된데 이어 여야 정치권이 1년 4개월 간 논의해온 사법개혁안도 흐지부지 됐다. 이는 검찰과 법원에 이어 청와대까지 가세한 반발 때문.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 검찰관계법소위원회가 이달 3일 대검 중수부 수사기능 폐지 방안에 합의하자 검찰은 부산저축은행 비리 수사를 일시 중단하는 등 강력 반발했다. 이달 6일에는 청와대가 중수부 폐지에 사실상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검찰 입장을 들어줬다. 결국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는 이달 13일 대검 중수부 폐지'양형기준법 제정 등 핵심 쟁점에 대해 타결을 시도했으나 합의에 실패했다. 이에 대해 장동엽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간사는 "검찰과 법원이 갖고 있는 막강한 권력은 국민들에게 위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검찰과 법원은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사법개혁안을 논의해 온 정치권이 외부 로비와 압력에 굴복해 국민적인 여망을 외면했다. 이번 사태로 사법개혁안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고 비판했다.

일반의약품 약국 외 판매도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보건복지부가 약사들에 밀려 일반의약품 편의점 판매는 보류해놓고 의사들이 반대하는 선택의원제는 밀어붙이려 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선택의원제는 고혈압 같은 만성질환을 가진 환자가 한 의원을 지정해 계속 치료받을 경우 환자 본인 부담을 줄여주는 제도. 대한의사협회는 환자 선택권을 제한하고 가정의학과나 내과로 환자가 몰리게 되는 현상이 발생할 우려 등의 이유로 선택의원제를 반대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이달 22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단체행동을 벌일 계획이다.

오래 전부터 문제시 되어온 전관예우도 우리사회 발전을 가로 막는 대표적인 기득권 폐해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7조원에 이르는 불법 대출과 분식 회계로 비리은행으로 낙인찍힌 부산저축은행 사태가 터지면서 전관예우가 국민적 지탄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금융감독원 등 힘있는 기관 출신 관료들이 부산저축은행 불법에 일조를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부산저축은행 피해자를 비롯해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한국에 기득권 문화가 만연하는 이유

기득권은 어느 시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문제는 정도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나칠 정도로 기득권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해 하혜수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는 '3고'(高)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기득권이 판을 치는 것은 '고밀도'(높은 인구밀도), '고경쟁'(치열한 경쟁), '고집중'(권력의 중앙집중화)의 '3고'가 상호 작용한 결과라는 것. 하 교수는 "땅이 좁고 자원은 빈약한데 인구밀도가 높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쟁이 치열해 질 수밖에 없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기득권을 획득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게 됐다. 진입 장벽은 높지만 기득권 계층으로 진입한 후에는 경쟁 없이 안주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된 것도 한 원인이다. 또 권력이 중앙으로 집중되면서 권력 숭배 현상이 강해졌고 권력의 일종인 기득권 수호에도 집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용교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끼리 끼리 문화를 원인으로 꼽고 있다. 정 교수는 "대학도 명문과 비명문으로 나뉘어져 있고 가방 하나를 두고 명품족과 비명품족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한국의 현주소다. '나는 당신과 다르다'는 차별화 의식이 끼리 끼리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네트워크가 기득권이 되는 구조가 형성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서구의 경우 혈연과 학연'지연을 넘어선 보편적 형제 개념이 사회 윤리로 자리잡은 반면 우리나라는 유교적 영향을 받아 협의의 형제 개념이 발달했다. 서구는 보편적 형제 개념을 바탕으로 공동선을 추구하면서 기득권의 문턱을 낮추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의 보편적 형제 개념은 받아 들이지 않고 효율성을 중시하는 문화만 받아 들이다 보니 보편적 관계망을 형성하는데 실패했다"고 강조했다.

◆기득권 타파 가능한가

최근 이명박 대통령은 전관예우가 공정사회로 가는 걸림돌이라고 질타했다. 이에 따라 전관예우를 타파하려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전관예우를 근절하려는 정책 방향에 대해서는 수긍하고 있지만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동안 제도가 미비해서 전관예우 폐해가 빚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행 공직자윤리법에 전관예우를 막기 위한 조항이 있지만 사실상 사문화 된 상태다.

특히 정부가 이달 3일 발표한 전관예우 근절 방안은 위헌소지(직업 선택의 자유 침해)가 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강훈 법무법인 바른 대표변호사는 "위헌 소지를 줄이기 위해 취업 자체를 금지하는 것보다는 로비 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법안을 상정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강조했다.

현 정권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기득권을 타파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다. 하혜수 교수는 "현 정부 핵심 세력은 기득권층 중에서도 최상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기득권 해체보다 기득권 보호에 앞장 설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대통령도 태생적으로 기득권 집단에 속한다. 대통령이 기득권 타파 의지를 보이더라도 지금은 레임덕 현상 때문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고 지적했다.

대구참여연대 박인규 사무처장은 "'강부자'(강남 부동산 부자) 내각, 부자감세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현 정권의 정책 방향은 친서민적이기보다 친기득권적이다. 서울과 지방의 구도 속에서 서울은 늘 기득권 지역이었다. 지방 분권을 포기하고 수도권 규제 완화를 실시한 것도 기득권 강화 정책이다"고 설명했다.

조광현 대구경실련 사무처장은 "현 정권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좋지 않다. 특권층 이익만을 대변한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 정책은 국민적 신뢰를 얻어야 성공할 수 있다. 현 정권에 대한 신뢰가 추락한 만큼 공정사회 건설이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이 실효성을 거둘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확산되는 노무현 전 대통령 향수

지난달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2주기를 맞아 서울'인천'대전 등 전국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다. 노 전 대통령의 고향인 봉하마을에는 지난달 하루 평균 수백 명의 추모객들이 다녀갔다. 노 전 대통령의 인기는 재임 때보다 오히려 서거한 뒤 더 높아진 느낌이다. 서거 2주년이 지났지만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숙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서민 대통령으로 기득권 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한 노 전 대통령의 행적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박인규 사무처장은 "재임 당시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순항을 하지 못했던 노 전 대통령의 개혁 정책이 서거한 뒤 재평가 받고 있다. 현 정부는 노무현 정부에 비해 투명성과 도덕성이 많이 떨어진다. 노무현 정부와 현 정부가 대비되면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확산되고 있다. 기득권이 고착화되면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는 서민들이 노 전 대통령이 추구했던 가치에 지금 공감을 표하고 있는 셈이다"고 말했다.

◆해법은 없나

하혜수 교수는 기득권 문화를 척결하기 위해서는 공정경쟁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 교수는 "선진국의 경우 공정경쟁시스템을 정착시켜 기득권 문턱을 낮췄다.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고 동일한 출발 선상에서 경쟁을 하는 공정경쟁시스템은 중립적인 전담기구를 통해 구축하고 관리해야 한다. 특히 기득권 세력의 조직적인 반발에 대비하기 위해 기득권 근절 조치들은 정권 초기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인규 사무처장은 "기득권을 낳는 주범인 부의 집중과 학력 지상주의 문화가 해체되어야 한다. 또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고 사회적 균형을 맞추는 장치도 마련되어야 한다. 이런 장치를 통해 국민에 의한 통제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수준 높은 민주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정용교 교수는 "물질보다 인간이 중시되고 특정 가치보다 보편적 가치가 중시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교육이다. 민주적 시민성을 함양하기 위해 정부'학교'언론'종교단체 등이 힘을 합쳐야 한다. 필요하다면 국민의식 계몽운동도 대대적으로 벌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안철수 카이스트 석좌교수는 "한국은 기득권 과보호 사회다. 이런 사회 구조가 작동하게 된 원인은 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 사회를 조율해 가는 것이 정치인데 그동안 정치는 기득권 과보호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며 정치권의 각성을 촉구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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