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예술가는 무수한 아픔과 시련을 겪고, 땀을 흘린다. 흔히들 '산고'(産苦)에 비유될 정도로 예술 창작 과정은 너무도 치열하다. 그렇기에 예술 작품마다엔 예술가들의 고뇌와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두운 동굴 같은 세월'을 인내하면서 예술 창작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작업 현장을 밀착 취재했다.
1)가창창작스튜디오
대구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 신선한 초록 수목이 우거진 폐교에 들어서면 여기저기서 예술의 흔적이 묻어난다. 운동장 한쪽에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건 진짜 나무가 아니다. 남진우 작가의 설치 작품이다. 화단 곳곳에는 굵은 철사로 만든 조형물들이 즐비하다. 이것은 6기 가창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 이준욱 작가의 작품들이다.
◆자연 속 '미술작가 인큐베이터'
이처럼 학교 운동장 곳곳은 설치 미술 작품들의 전시장이나 다름없다. 4년간 40여 명의 작가들이 거쳐 가면서 그 예술의 흔적들이 운동장과 학교 곳곳에 잔향처럼 남아 있다.
가창창작스튜디오의 상주 입주 작가는 7, 8명. 이들은 이곳에서 약 70㎡(20여 평) 규모의 교실 한 칸을 작업실로 받아 1년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입주작가는 관람객들을 직접 작업실에 초대하는 오픈 스튜디오, 해외 작가들이 입주하는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 각종 교육 프로그램 및 워크숍을 진행하게 된다. 일 년간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작가는 작업에 열중할 수밖에 없다.
가창에서 보내는 일 년이라는 시간은 작가들에게 꽤나 길고 중요한 시간들이다. 실제로 입주 작가들은 일 년의 시간 동안 작품 성향이 많이 변한다. '가창'이라는 장소성과, 동료 작가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관계성은 작품에 꽤 많은 변화를 가져다준다.
특히 해외의 작가들이 3개월간 체류하며 함께 작품 활동을 하는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작가들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다. 실제로 작가들 간의 국제적인 네트워크가 되기도 한다. 독일 작가가 이곳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진행한 후 이것이 인연이 돼 가창창작스튜디오 작가 3명이 독일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도 했다. 유학으로 연결된 경우도 있다. '인연'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올해는 다음달 방글라데시, 이탈리아, 미국 작가 세 명이 참가한다. 이들이 작가들에게 어떤 영감과 네트워크를 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새벽에 홀로하는 작업, 행복하다."
작가 양승훈(30) 씨는 심의를 거쳐 8기에 이어 9기 레지던시 프로그램에도 참가하고 있다. 8기 작가들이 모두 떠나고 9기 작가들이 하나둘 들어오고 있는 요즘, 그는 터줏대감 역할을 하며 창작에 매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입주한 작가는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저녁형 인간'인 양 씨의 아침은 오전 10시에 시작된다. 낮에는 주로 동료 입주 작가들과 함께 처리해야 하는 회의, 청소 등에 시간을 보낸다. 식사는 스튜디오 내 취사 시설을 이용해 함께 만들어 먹기도 하고 근처 식당에서 먹기도 한다. 양 씨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해가 지면서 시작된다. 새벽시간에 홀로 불을 켜고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이 양 씨에겐 큰 행복이다. 레고, 인형 등의 장난감을 크게 확대해 보여주는 양 씨의 작품은 대부분 새벽에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양 씨에게 창작스튜디오 공간은 작가로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고 있다. "학교 다닐 때는 작업공간이 좁지만 여기는 공간 자체가 커요. 전시장을 염두에 두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 됐죠. 혼자 작업해서 전시하기란 정말 힘든데, 이곳에선 시스템이 있어 평론가들에게 글도 받을 수 있고 전시도 할 수 있어 정말 좋아요."
지난달 말 9기로 입주한 신경철(33) 씨는 기대가 크다. 개인 작업실로는 더없이 넓어 이제 대작도 할 수 있게 됐다. 교실 벽 하나 크기나 되는 패널도 주문해두었다.
"모든 작가가 자기만의 세계가 있지만 다른 사람이 보는 시각도 중요합니다. 혼자 작업하면 소홀해질 수 있는 부분을 다른 작가들과의 소통을 통해 알 수 있어 더 나은 작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우연적인 페인팅을 한 후 물감이 지나간 자국에 연필로 테두리를 그린다. 꼼꼼하게 몰두해야 하는 작업이라 조용한 가창 작업실이 제격이다. "아주 지루한 작업이지요. 마라톤의 데드 포인트처럼, 도저히 더 이상은 못할 것 같은 한계가 옵니다. 하지만 그것을 몇 번 넘고 나면 더 큰 욕심이 생기고 작품에 대한 생각도 커지지요."
열흘 전 입주한 김영지(26) 씨는 요즘 나비 채집에 한창이다. 원래 설치, 사진, 영상 작품을 하던 작가가 가창에 들어왔으니 가창과 관련된 작업을 할 계획이다. 그녀의 작업실 칠판에는 'now∨here'이라고 쓰여 있다. 김 씨가 앞으로 가지고 갈 창작의 화두다. "어디든 정착할 수 없는 '노마드'가 작업 아이템이었는데, 이곳에서 아무데도(nowhere)이지만 띄어 써보면 now here이에요. 바로 여기라는 의미죠."
그는 나비와 나방을 모으고 있다. 잠자리채를 들고 다니며 나비를 잡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다. 앞으로 가창의 하늘을 날던 이 나비들이 어떤 형태의 미술품으로 재탄생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김 씨에게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다른 작가들과의 교류 방법이기도 하다. "사실 평소엔 만나던 사람만 만나게 되거든요. 그래서 새로운 자극이 적은데, 이곳처럼 모르는 작가들과 만나면 새로운 시너지 효과가 나올 것 같아요."
9기 작가로 새로 입주한 장윤선(27) 씨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다. 자연 풍경이 좋은 가창을 배경으로 매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배경에서 사진을 찍을 계획이다. 머리카락이 길어가고 옷은 낡아가는 그 시간성을 사진에 담는 것이다. "며칠 전엔 무도 심었어요. 3일 만에 새싹이 수북하게 났어요. 참 평화로운 곳이에요."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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