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박시교 시인이 시집 '아나키스트에게'를 펴냈다. 그의 아나키스트는 누구일까. 시집을 살펴보아도 흔히 아나키스트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정치적 느낌과 통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어쩌면 시인은 태어나서 찰나를 살다가 죽고야 마는 우리인생을 아나키스트에 비유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또 먼 길 떠날 채비하는가 보다/ 들녘에 옷깃 여밀 바람 솔기 풀어놓고/ 연습이 필요했던 삶도 모두 놓아버리고/ 내 수의(壽衣)엔 기필코 주머니를 달 것이다/ 빈손이 허전하면 거기 깊이 찔러 넣고/ 조금은 거드름피우며 느릿느릿 가리라/ 일회용 아닌 여정이 가당키나 하든가/ 천지에 꽃 피고 지는 것도 순간의 탄식/ 내 사랑 아나키스트여 부디 홀로 가시라' -나의 아나키스트여- 전문.
시인은 중국 사상가 노자와 비슷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듯도 하다.
'발이 되지 않는/ 돈 과도 담을 쌓은/ 시 앞에서/ 나는 때로/ 한없이 오만해진다/ 세상에/ 부릴 허세가/ 이것밖에/ 없어서' -가난한 오만- 전문.
박시교의 시는 어렵지 않다. 복잡한 용어도, 수사도 없다. 그럼에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의 시가 문자(文字)가 아니라 그림에 가깝기 때문이다. 처음 읽을 때 보이지 않던 것이 두 번째 읽을 때 보이고, 두 번째 읽을 때 명확했던 것이 세 번째는 달리 보인다. 그러니 그림에 가깝다고 할 수밖에.
문학평론가 구중서는 '시인이 끝내 귀의하는 경지는 계곡 물소리에 귀를 씻고 있는 안빈이다. 막상 이 대목에서 알게 되는 것은 스스로 솟구치는 리듬을 격조로 다듬은 시조라는 것이다. 자유시를 성취한 그 위에 있는 시조, 박시교 시인은 오늘날 한국 시조의 아나키스트다'라고 평가했다.
'햇빛이 그 비늘을 털고 있는 봄날 아침/ 뜬 눈으로 지샌 비나리(경북 봉화군 청량산 아래 마을)에서/ 비로소 나는 보았다 (중략) 이 아침 밀려오는 허허로움은 무엇인가/ 지금껏 나를 지탱해 온/ 저 푸른 고향 산 빛이/ 뜻 모를 눈시울에 얼비쳐/ 낯설기만 한 것은' -비나리의 아침- 중에서. 83쪽, 8천원.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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