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 시가 흐르고, 시집 한 권쯤은 가슴에 품고 사는 국민은 아마 한국인밖에는 없을 것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베스트셀러 시집이 탄생하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 아니던가. 사실상 1980년대는 단연 시의 시대였다. 서정윤의 '홀로서기'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같은 시들이 전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 지금은 비록 베스트셀러 자리를 소설에 내주긴 했지만 시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은 각별하다.
올해로 열아홉 번째를 맞는 공초문학상의 주인공으로 시인 정호승이 선정됐다. 70, 80년대 가슴 아리는 시어로 사랑을 노래하던 시인도 어느덧 예순 줄에 접어들었다. 정호승은 고3 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유일하게 문예 장학생이 가능했던 경희대에 무시험으로 입학했던 소위 떡잎부터 될성부른 시인이었다. 열 번째 세상에 나온 그의 시집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는 시가 이번에 그에게 수상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수상 자리에서 그는 시대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게 시인의 역할이지만 지금은 자기 눈물 닦기도 버겁다며 부디 자신의 시로 위로를 받고 스스로 눈물을 닦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노라고 했다. 역시나 '사랑의 시인'다운 말이었다.
공초 오상순은 염상섭, 김억과 함께 동인지 '폐허'의 3인방으로 불린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대구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시인이다. 근 20년을 대구에 살면서 이상화, 이장희, 이육사 등의 문인들과 교류했다. 대구 출생인 정호승과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공초의 시에는 동양적 허무사상이 짙게 배어 있다. 불교의 공사상(空思想)을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공초(空超)라는 호를 얻었지만 정작 담배를 좋아해 '꽁초'로 불리기도 했다. 무소유의 삶을 살다간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구상 시인에게 "자유가 인생을 구속하였구나"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오늘은 공초, 그리고 정호승과 함께 새삼 시를 곱씹어 보았다. 한국인은 누구보다 시를 좋아하는 국민이다. 지난해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며 세계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시인을 꿈꾸는 소녀 같은 60대 여인 미자를 연기한 배우 윤정희의 모습은 한국인의 시에 대한 애정과 동경을 대변해 준다.
영화 속에 삽입돼 한결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간 연시들도 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지금은 떠나고 없는 배우 최진실이 열연했던 영화 '편지'에서 많은 관객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던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다.
오늘만은 쉽고 절로 마음에 와 감기는 옛 연시들을 읽고 싶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정호승, 상처받은 영혼들을 향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며 위로해 주었던 그의 따뜻한 시에 흠뻑 빠지고 싶은 그런 오후다.
최중근 구미탑정형외과연합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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