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생생하게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장수한다고 한다. 인생의 반추가 삶에 활력소가 되어 장수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추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생애가 아무리 찬란했더라도, 감추어둔 보물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그러나 추억이 늘 즐거운 것은 아니다. 사람에 대한 추억 내지 기억은 사실적으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 채색되어 저장된다. 반가운 재회는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아름다운 감정으로 덧칠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재회도 있다.
난감한 재회로 진땀을 뺀 어느 판사의 이야기다.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시골 부인이 상대여자에 대한 상해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아내와 자식이 있는 남자를 꼬드긴' 파렴치한 여자를 때린 게 어떻게 죄가 되냐며 호소도 하고, 그 여자가 제풀에 넘어져 다쳤다고 발뺌도 한다. 상해의 정도가 심한데도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때린 사실조차 부인하고, 합의를 권유하였으나 이를 거부하며 공탁조차 않으니 판사로서는 부득이하게 실형을 선고하며 법정구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몇 달 후 그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그 '불도저 아주머니'를 만났다. 법정에서도 굴하지 않던 그 부인을 아무도 말려줄 수 없는 곳에서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피할 곳도 없다. 시치미를 떼고 모른 척할 수밖에. 건너편에서 빤히 쳐다보는 아주머니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조마조마한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 기다린다. 마침내 아주머니가 다가온다. 가슴이 쾅 내려앉는다. "판사 맞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닌데요"라며 부인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가더니 잠시 후 재차 "판사 맞잖아요?"한다. "아닙니다. 회사원입니다." 그러나 얼굴까지 들이밀며 "에이, 판사 맞는데요"라는 말에, 베드로만큼 낯이 두껍지 못한 그는 세 번씩 부인할 수는 없었다.
자기에게 실형을 선고한 그날의 판사란 걸 확인한 아주머니는 바닥에 철썩 주저앉아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한다. 결국 2심에서 합의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단다. 구속된 상태에서의 불리한 합의였으니 그 조건이 대충 짐작이 된다. 좁은 시골 동네에 감옥소를 다녀온 여자라고 소문이 나서 고개도 못 들고 다닌다. 남편과 그 여자는 보란 듯이 살림까지 차렸고, 더 분한 것은 '나쁜 년'이 '형님' 소리도 한번 안 한다는 것이다. 본부인이 불륜녀와 동서지간으로나마 지내기를 바라는 심정이 가히 딱하다. 혹시 봉변이라도 당할까 봐 싫은 내색도 못하고, 때로는 위로도 하며 진땀을 흘렸단다. 그나마 다행히 판사에 대한 원망은 없더란다.
그 친구는 그날의 외나무다리 재회 후로 깨달은 바도 많았다. 재판 중에 당사자들의 진술을 더 경청하게 되었고, 판결도 더욱 신중히 하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서로 칙칙한 색깔로 채색되었던 기억이, 그날의 재회를 통하여 조금이나마 아름다운 색깔로 덧칠되어 기억되리라 여겨진다.
이석화(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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