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들은 피곤하다. 직장에서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만사를 잊은 채 마음 편히 쉬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은 아버지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놀아달라며 보채는 아이들을 떼놓기가 어렵다. 아이들이 커도 문제다. 중'고교생 자녀에겐 말 한마디 붙이기도 힘들다. 말을 건네도 돌아오는 답은 단답형이다. 마주 앉혀 두고 대화를 나눠도 재미있어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자녀 교육은 어머니의 몫인 가정이 많다. 아버지는 이따금 어머니의 극성스러움(?)에 핀잔을 줄 뿐이다. 제대로 된 자녀 교육을 위해선 '할아버지의 경제력', '아버지의 무관심', 그리고 '어머니의 경제력'이 필수라는 속설이 나도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자녀가 균형잡힌 사고력을 기르고 바른 인성을 갖길 바란다면 아버지도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25일 서부교육지원청이 연 '아빠와 함께하는 가온누리 캠프'와 동부교육지원청이 마련한 '아빠와 함께하는 입학사정관제 준비 전략 연수회'에서 이 시대 아빠들을 만나봤다.
◆자녀와 놀아주세요
"아빠와 함께 해서 더 신나요!"
25일 찾은 대구시 달서구 송현동 대구시청소년수련원 한 강의실. 빨간 권투 글러브를 낀 아버지와 아들 9쌍이 신나는 댄스 음악에 맞춰 율동 연습에 한창이었다. 아버지들은 아들들과 달리 엉성한 동작에다 박자를 놓치기 일쑤였지만 강사의 동작을 열심히 따라했다.
강사가 잠시 쉬는 시간임을 알리자 곳곳에서 부자지간 권투 대결이 벌어졌다. 주먹을 마구 휘두르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얻어 맞곤 했으나 아이들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한 아버지는 아예 권투 교습에 나섰다. "일단 자세부터 제대로 잡아.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무릎을 살짝 구부려야지. 그리고 왼손으로 잽부터 날려!"
이 프로그램은 '아빠와 함께하는 가온누리 캠프' 중 과제 수행 과정 가운데 하나인 헬스로빅. 다른 강의실에서는 핸드벨과 영상물제작팀이 과제 수행에 열을 올렸다. 캠프에는 서부교육지원청이 지역 27개 초교에서 추천받은 27가족 54명의 아버지와 자녀가 참가해 수행한 과제를 발표하는 시간도 가졌다.
넉넉한 체격의 변정훈(37) 씨는 헬스로빅을 익히느라 진땀을 흘렸지만 표정은 밝았다. "사실 피곤하고 힘들어요. 그래도 오랜만에 아들 광욱(문성초교 6년)이와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어 좋습니다. 앞으로 학교별로도 이런 기회가 좀 더 늘어나 많은 아버지들이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수련원 지하 한 교실에선 맑은 종소리가 음악이 되어 흘러나왔다. 핸드벨로 '즐거운 나의 집', '미뉴에트' 연주를 익히는 중이었다. 자신의 자녀와 같은 음계를 맡은 아버지들은 자녀 뒤에 서서 악보를 보면서 손에 쥔 핸드벨을 흔들었다. 따로 따로 들으면 종소리에 불과했지만, 한데 어울리자 제법 훌륭한 곡조가 됐다.
김형동(45) 씨는 아내의 권유로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게 어색하다던 딸 현정(복현초교 6년)이는 어느새 김 씨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평상시 딸과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아내가 어떻게든 해보라며 등을 떠밀더군요. 하루 종일 함께 있다 보니 조금이나마 딸과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곧 사춘기가 될 텐데 이런 시간을 좀 더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운영하는 가게를 지인에게 맡겨두고 참가한 이종열(42) 씨. 아이 한 명만 함께 참가할 수 있는 조건 때문에 쌍둥이 아들 중 형인 준원(비봉초교 5년)이만 데려온 게 아쉽다고 했다. "집에선 아무리 대화를 해도 곧 '숙제해라', '공부해라' 등 딱딱한 얘기로 흐르고 마는데 이곳에선 안 그래요. 복잡한 생각 없이 아이와 신나게 놀다 보니 이런저런 말을 편하게 나눌 수 있게 되네요. 아들이 요즘 무슨 생각을 많이 하는지도 알게 돼 좋습니다."
오후 4시 무렵 이들 일행은 모두 모여 과제 수행 발표회를 갖는 것으로 행사를 마무리했다. 오전 시간 흰 티셔츠에 물감 등으로 꾸민 커플 티셔츠를 만들어 입은 덕분에 어느 아버지와 아이가 가족인지 한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이 즐거웠다"며 "앞으로도 나랑 좀 더 놀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캠프를 기획한 서부교육지원청 박순해 교육장은 "아버지와 자녀 관계를 가깝게 하고 어머니와는 또 다른 사고방식 등을 익힐 수 있도록 마련한 행사"라며 "이번 캠프에서 아이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입시 준비? 아빠가 간다
"입시와 공부에 대해 알아야 아이와 대화가 되죠."
입시 관련 설명회가 열리는 곳에 어머니들로 북적이는 것은 일상적인 풍경이다. 하지만 25일 대구시교육정보원 시청각실에서 열린 입시 설명회는 색달랐다. '아빠와 함께하는 입학사정관제 준비 전략 연수회'에 참여한 학부모 200여 명 중 절반 이상이 입시 정보를 얻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아버지들이었다.
이날 강연에 나선 박재완 대구시교육청 진학진로지원단장(혜화여고 교사)은 수능시험 구조에 대한 설명에 이어 입학사정관제 전형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나갔다. 박 단장은 아버지들에게 자녀의 학습 컨설턴트가 되라고 권했다. 그는 "'돈을 버는 기계'가 아니라 자녀와 생각과 생활을 공유하는 아버지가 되려면 자녀의 적성을 함께 찾아보고 인터넷과 설명회 등을 통해 대입 정보를 모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며 "자녀가 진학하고 싶은 대학에 자녀와 같이 가보는 것도 자녀의 진로를 설계하는 데 좋은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아버지들은 볼펜을 쥐고 메모를 하거나 휴대전화 카메라로 자료 화면을 찍는 등 박 단장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요리를 배우기 위해 특성화고로 가려는 딸과 씨름하다 결국 딸의 손을 들어준 일 등 박 단장이 딸을 키우면서 느낀 고충을 얘기할 때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중 3년생 외아들을 둔 신윤호(45) 씨는 "아내가 가진 정보는 대부분 어머니들끼리 나누는 '카더라 통신'에 의한 것이어서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머리가 확 맑아진 느낌"이라며 "공부만 하라고 할 게 아니라 강연에서 들은 것처럼 아이가 좋아하는 음악 분야로 진로를 열어줄지도 고민해봐야겠다"고 말했다.
이날 강연 덕분에 김성종(47) 씨는 이따금 고 1년생 아들과 대화를 시도해도 말다툼으로 번지기 일쑤인 원인을 찾았다. 그는 "공부 얘기가 주된 화제인데 아들은 나더러 '항상 옛날 얘기만 한다'고 짜증을 냈다"며 "이곳에서 내가 요즘 입시 정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이런 설명회를 좀 더 찾아다녀야 겠다"고 했다.
대구시교육청도 자녀 교육에 대한 아버지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점점 늘리고 있다. 5월 8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부자교실을 운영했고 다음달부터는 시교육청 학부모교육센터에서 '아버지 대학'을 운영한다. 4일 '교육과 입시의 핵심, 자녀의 자기주도적 학습'을 비롯해 11, 18, 25일까지 4개 강좌를 마련해 오후 7시부터 2시간 동안 진행한다. 수강 신청은 홈페이지(parent.dge.go.kr)에서 받는다.
시교육청 학부모정책담당 이호근 장학사는 "맞벌이 부부가 많아짐에 따라 자녀 교육 역시 어머니에게만 맡겨두긴 힘들어지는 추세인 데다 아버지들의 관심도 조금씩 늘고 있다"며 "학교 현장에서도 여교사 비중이 늘면서 남자 역할이 필요한 곳이 많아 아버지들이 적극 나서주면 각종 체험 프로그램 등 교육 활동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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