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27일 미국 LA에서 오른쪽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을 때만 해도 삼성 라이온즈 배영수는 사실 별 걱정이 없었다. 2004년 17승을 거둬 정규리그 MVP를 수상한데다 2005년과 2006년 팀 우승을 일궈내 자신감과 믿음이 충만했다.
만약 그가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의 삶에서 가장 잔인하고 고독한 싸움을 치르게 될 줄 알았더라면 어쩌면 그는 수술을 미루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추락의 아픔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승승장구하던 젊은 배영수에게 그만큼 고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2007년 재활훈련에 매달렸고 휴식도 충분히 취해 재기가 눈앞에 온 것 같았다.
그러나 함정이 숨어 있었다. 빠른 회복이 오히려 화근이 된 것이었다. 2008년 서둘러 마운드에 오른 배영수는 시범경기에서 146㎞의 스피드를 선보였지만 정작 리그에서는 구위가 조금씩 떨어지다가 중반 들어서는 138㎞까지 떨어졌다. 2009년은 더 참담했다. 1승12패를 기록했고 선발로 나선 플레이오프에선 실망감을 안겼다.
스피드가 더 이상 오르지 않자 주변에선 소문이 무성하게 나돌았다. 더 이상 예전의 구위를 회복하지 못해 재기가 어렵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에겐 육체적인 문제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더 짐이 됐다. 난생 처음으로 주위를 의식하게 되고 이대로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한동안 야구를 그만 둘까도 고민했다.
그러나 타고난 성격이 그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았다. 2010년 마음고생을 털어내고 주어진 문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첫째는 몸을 제대로 만드는 일이었다. 수술과 재활 이후에 급하게 예전의 모습을 찾으려 했던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고 그로인해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스스로 개인교습에 나섰다. 김연아를 지도한 교수를 찾아 몸의 밸런스를 잡는 강의를 듣고 자문을 구했다. 야구외적으로 도움을 청한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는 이미 극복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투구의 스타일에 대한 자문도 청했다. 예전의 그는 전형적인 빠른 볼 투수여서 다양한 구질이 필요 없었다. 타자를 압도하는 빠른 볼이 있어 예리한 슬라이더와 포크볼이 통했지만 스피드가 떨어진 현재로선 별 효과가 없으니 변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땅볼을 유도하기 위한 투심과 플라이 볼을 유도하기 위한 서클 체인지업을 익히기 시작했다. 실전피칭을 통해 타자의 중심을 뺏기 위한 속도에도 변화를 줬다.
범타를 유도하고 효과적인 피칭에 관점을 바꾸면서 배영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신체 밸런스에 대한 교습은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몸 상태가 점점 호전되자 팔의 상태도 좋아졌다. 마음을 비우니 구속도 점점 향상됐다. 스피드에 집착할 땐 141㎞가 고작이었지만 마음을 비우니 147㎞까지 올라갔다. 지난해 두산과의 플레이오프 때의 기록으로,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이었다.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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