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수도권 대기업과 지방

대기업의 소모성 자재 구매대행(MRO) 사업 진출을 두고 소상공인들의 반발이 매섭다. MRO(maintenance, repair and operation)는 기업에서 사용하는 문구와 각종 소모성 용구 등을 납품하는 사업 영역으로 전통적으로 소상공인들이 맡아왔던 분야다. 취급 품목이 필기류와 복사지, 면장갑과 망치 등으로 대기업이 이름을 걸고 사업을 하기에는 누가 봐도 부끄러운 영역이다.

하지만 삼성과 LG, 포스코까지 내로라하는 대기업 모두가 MRO 시장에 뛰어들었고 문어발식으로 사업 영역 확장에 나서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동반 상생'을 강조하며 앞다퉈 대기업의 MRO 사업 확장에 '경고'를 주고 있지만 대기업의 '탐욕'을 얼마나 막아낼지는 미지수다.

한국 대기업은 1970, 80년대 '성장 한국'의 자랑스러운 역군이었다. 열사의 땅 중동에서 모랫바람을 맞으며 달러를 벌어들였고 자동차와 전자 산업을 일으켜 수출 대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2, 3세 경영으로 넘어가고 IMF로 중견기업과 소상공인이 몰락한 뒤 대기업들은 이들의 빈자리를 채우며 끝없는 '영역 파괴'에 나서고 있다. 자본의 논리를 앞세운 대기업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은 경제 구조의 '수직 계열화'란 병폐로 이어진다. 중견 기업들은 협력업체로 내몰리고 자영업자들은 '프랜차이즈'나 '입점 업체'란 이름으로 대기업에 종속되고 있다.

대기업의 분별 없는 사업 확장이 국가 전체 경제에 폐해를 가져 온 대표적인 분야가 '주택사업'이다. 1980, 90년대까지 주택 사업은 '중견기업'의 몫이었다. 현대와 대우 등 내로라하는 업체들은 해외 사업과 대형 토목'건축 분야에만 주력했고 주택은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자제를 했다.

대구에서 성장한 청구, 우방이 1990년대 서울에 진출해 전국 주택 공급 1, 2위를 기록한 것도 대기업 건설사의 이러한 '통 큰 경영' 역할이 상당했다. 대구뿐 아니라 다른 지방 대도시들도 '토종 건설사'들이 주택업을 담당하며 지역 경제 활성화에 상당한 몫을 해왔다.

하지만 IMF 이후 주택 전문 업체들이 도산한 자리를 대기업이 채우기 시작했다. 기존 대기업 계열 건설사는 물론 건설사가 없던 대기업들까지 잇따라 주택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엄청난 자본을 투입해 브랜드를 만들고 광고를 통해 아파트를 '유통 상품'으로 변질시켰다. 또 이들 대기업은 수도권 주택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고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수도권 규제가 심해지자 2000년대 중반 이후 대구와 부산 등 지방 대도시로 몰려들었다. 사업지를 구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땅값을 올리고 차별화된 주거공간이란 광고를 앞세워 분양가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수요' 없는 공급은 대량 미분양으로 이어졌고 주택 가격 하락과 거래 실종이란 결과를 만들어 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지역에 기반한 건설업체들은 하나 둘 무너졌고 아파트를 분양받은 계약자는 할인 분양과 마이너스 프리미엄으로 말 못 할 경제적 고통을 겪었다. 저축은행 부실의 또 다른 원인인 아파트 PF 대출도 대기업이 주택 사업에 뛰어든 이후 생겨난 후유증 중 하나다. 다행스럽게 아파트가 돈이 되지 않는 사업으로 전락하면서 주택사업에서 철수하는 대기업이 늘고 있지만 이들이 휩쓸고 간 폐해는 상당하다.

살아남은 지방 건설사가 몇 개 없다 보니 지역에서 낙동강 사업 등 대형 건설사업이 발주되더라도 온통 대기업의 독차지가 되고 있다. 지방 건설사는 '지역 지분'이란 명분으로 이름을 빌려주고 지분 일부를 받는 '들러리'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지방의 건설산업 기반이 붕괴된 셈이다. 물론 유통이나 제조업도 비슷한 상황이다.

더욱 문제는 대기업의 95%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는 점이다. 각 분야에서 지방 경제의 자생력을 붕괴시킨 대기업들은 지방의 돈을 수도권으로 빨아들이는 모세혈관 역할을 하고 있다. 수도권과 대기업이란 '이중 벽'에 막혀 지방 경제는 '하도급 경제', 비수도권 주민들은 '이류 시민'의 설움을 받고 있다. 또 수도권 대기업의 횡포를 비난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대기업 투자 유치에 목을 매야 하는 것이 지방 경제의 가슴 아픈 현실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중소기업과의 상생, 지방 경제 활성화가 국정과제로 부각된다. 하지만 항상 구호로만 그칠 뿐이다. 수도권이 아니더라도 삶의 질이 보장되고, 대기업이 아니더라도 사업할 수 있는 한국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재협(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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