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상 유교사상에 입각해 사회 개혁을 모색한 일은 멀리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과 고려 초기 최승로의 활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치원 등 나말(羅末) 6두품 지식인의 개혁 시도는 골품제라는 낡은 틀에 얽매여 그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 최치원은 최초의 선비
당나라 유학파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중국 대륙에 문명을 떨쳤던 최치원은 신라로 돌아왔지만 관직이 6두품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진성여왕 8년(894년)에는 '시무 10조'를 올려 과감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국제감각을 지닌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지만, 난세의 불우한 지식인이었던 그는 결국 자신의 호 고운(孤雲)이 상징하듯 외로운 구름이 되어 자연과 종교의 품으로 귀의하고 말았다.
남동신 서울대 교수(국사학과)는 "유자(儒者)이자 문인(文人)이요 관료였던 최치원은 곧 선비의 옛모습"이라며 "그의 등장은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들이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유교적 개혁세력의 등장이다.
최치원과 같은 6두품 출신으로 통일신라 말기 3최(崔)로 통했던 당나라 유학파 중 최승우는 후백제 견훤의 책사가 되었으며, 최언위는 고려왕조에서 벼슬길에 오르는 등 격변기의 행보가 엇갈렸다.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태어난 최승로는 고려 왕조의 국정 방향 지침서를 내놓은 인물이다. 신라 멸망 후 고려 왕조의 관료로 새로운 삶을 모색했던 그는 성종에게 '시무 28조'란 국정 쇄신책을 올려 고려사회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정치개혁론으로 평가되는 28조에 달하는 최승로의 시무책(時務策)이야말로 고려가 국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틀을 다지는 규범이 된 것이다.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곧 최치원의 '시무 10조' 정신의 계승이었다.
유학자임을 표방한 개혁성향의 지식인들이 정치 일선에 본격 등장한 것은 고려 후기부터이다. 소위 신진 사대부 세력으로 안향의 주자학맥을 이은 이제현, 이색, 정몽주, 정도전, 권근, 길재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이들은 한편으로는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유교적 질서의 현실적 구현이야말로 사회 개혁을 위한 정치적 기획이자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밝혔다.
◆ 경북 출신 학자들의 맹활약
고려 후기에 이르러 경북 출신 관료 학자들이 정주학(程朱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 자체가 개혁정신의 발로였다.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 왕조의 쇠락과 함께 해이해진 사회 기풍과 피폐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한 새로운 사상적, 철학적 대안이 당시 중국에서도 새로운 학설이었던 정주학이었던 것이다.
이를 최초로 들여와 후학들에게 전한 인물이 영주 순흥 출신인 안향(安珦)이다. 안향은 왕과 공주를 모시고(扈從) 원나라에 가면서 정주학(주자학, 성리학)을 접하게 된다. 박찬극 영주문화원장은 "안향 선생은 9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의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손수 베껴왔다"며 "귀국 후에는 선비양성의 재정적인 뒷받침을 위해 문무백관에게 품계에 따라 은(銀)과 베(布)를 차등적으로 거두어들일 것을 왕에게 강력히 건의했다"고 밝혔다.
조선 왕조 건국의 초석을 놓은 정도전 또한 안향의 개혁적인 유맥(儒脈)과 학통을 이은 인물이다. 경북 봉화의 향리 가문 출신인 정도전은 늘 개혁적인 입장에서 보수적인 권세가들과 맞섰다. 특히 공민왕 때 개혁의 선봉에 섰던 그는 왕이 세상을 떠나자 척신세력에 밀려 9년간 유배와 유랑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때 내우외환으로 무너져가는 고려 왕조를 대신할 새 왕조 건설이란 근본적인 개혁의 꿈을 키워나갔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함께 현실화된 역성혁명이 그것이다. 정도전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 건설의 설계자였던 것이다.
김훈식 인제대 교수는 "정도전이 쓴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불씨잡변' 등은 새 왕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역작"이라며 "조선왕조의 궁궐에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근정전, 강녕전 등 중요 전각의 이름을 지으며, 궁성과 종묘사직의 구도를 잡은 사람도 바로 정도전"이라고 했다.
한영우 한림대 교수는 "조선경국전은 조선 왕조 500년의 기틀을 놓은 헌법으로, 그 바탕을 이루는 인간과 사회 및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풍부한 인문정신에 주목해야 한다"며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에 그만한 사상을 가지고 그만한 사회개혁과 문명개혁을 성취한 인물이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 조선 선비의 뿌리는 경북
역성혁명에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이었던 고려 말 절의파의 학맥과 정신을 이은 경북의 선비들은 조선 초에 형성된 훈구척신세력에 대항하는 새로운 개혁적 정치집단 즉 사림파로 성장했다. 조선 전기 정국의 주류를 이뤘던 훈구파, 특히 수양대군(세조)의 계유정난에 편승해 공신의 지위를 확보한 세력은 건국 초기의 문물과 제도 정비를 담당한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지만, 부정부패와 비리전횡의 주역이기도 했다.
공신의 이름으로 정국을 농락하고 시대의 모순을 심화시키는 이들 훈구파에 맞선 새로운 정치세력이 영남 사림파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경북의 선비들이 주류를 이뤘다. 개혁의 화신으로 기묘사림의 중심 인물이었던 조광조가 자신이 추진한 혁신정책이 스승인 김굉필의 학문과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었다고 공언하며, '정몽주-길재-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의 학통을 스스로 확립한 것만 봐도 그렇다.
훈구척신의 시대를 넘어 사림의 시대를 열어가는 16세기에는 숱한 사화(士禍)가 속출했고 수많은 사림의 희생이 뒤따랐다. 먼저 김종직이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빌미가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면서 김일손 등 많은 경북 선비들이 죽음을 당했다.
유배지인 평안도 희천에서 조광조를 만나 학문을 전수한 김굉필은 연산군이 일으킨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목숨을 잃었고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사림들이 또다시 피를 흘렸다. 김굉필은 그러나 조광조라는 위대한 개혁정신을 우뚝하게 키워놓았다.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 또한 중중 때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았지만, 명종 때의 을사사화를 전환점으로 한 퇴계 이황의 개혁전략 수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림은 16세기 후반인 선조대에 이르러 기어이 새시대를 열고야 만다.
조광조의 정치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정책의 실패에 대한 반성으로 퇴계는 온건하고 점진적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방식을 추구하게 된다. 철학적인 작업을 통해 시대정신을 바로 세우면서 개혁의 명분을 강화하고자 했으며,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세대 선비를 양성함으로써 다음 시대를 기약한 것이다. 퇴계의 개혁은 조광조의 비판적 계승이었다.
김성우 대구한의대 교수는 "영남(경북)이 중심이던 사림파의 집권은 그 역사적 의의가 오늘날 우리 정당정치에서 수평적 정권교체가 갖는 의미보다도 크다"며 "지방 출신에 의한 정권교체라는 점에서도 한국 역사상 초유의 정치적 대사건이었다"고 평가한다.
◆ 독립운동으로 승화한 선비정신
경북 선비의 개혁정신은 나라가 기울던 20세기 벽두 '혁신유림'이란 또 다른 모습으로 풍운의 역사 전면에 등장한다. 혁신유림이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관념에서 탈피해 자주적인 민족주의 사상을 정립하고자 노력한 선비들의 움직임을 말한다. 그 중에서도 퇴계의 학문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안동유림의 획기적인 변화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류인식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등이 그들이다.
안동에서 가장 먼저 혁신유림으로 전환한 인물은 류인식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의절 당하고 스승에게 파문 당하는 아픔 속에서도 '선비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바뀌어야 한다'는 주역의 '수시변역'(隨時變易)을 논리로 삼아 유학개신론자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갔다.
류인식은 '신학문이 인륜을 어지럽히고 인심을 무너뜨린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나라와 백성을 위해 선비들이 공부해야 할 학문'이라는 믿음으로 근대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열었다. 협동학교는 곧 안동지방 계몽 운동의 요람이자, 보수성이 강한 유림들에게 사상적 대변환의 갈림길이 된 것이다.
이상룡은 기존의 학문과 실천에 대한 자기반성을 통해 계몽운동을 새로운 과제로 설정하며 1909년 3월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했다. 이는 구한말의 의병항쟁과 계몽운동을 계승하는 한편, 일제강점기 만주 한인사회 건설과 무장 독립운동의 밑바탕이 된다. 협동학교를 강하게 비판하던 김대락도 65세의 나이에 근대 교육을 지향하는 혁신적인 사고의 전환으로 자신의 집을 협동학교 교실로 제공하며 안동과 경북 유림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안동대 교수)은 "위정척사에 대한 자기 성찰을 통해 계몽운동을 지향한 안동 혁신유림은 협동학교와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통해 보수유림의 완고한 풍습을 혁신하고 자주독립사상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며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만주 지역 독립군기지 건설에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고 밝혔다.
조향래기자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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