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금당실'과 '맛질' 등 두 마을은 서로 이웃해 있으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대표적인 양반마을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이곳에 도읍을 만들려다 큰 내(川)가 없어 무산됐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금당'맛질 반서울'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조선시대 정감록의 십승지지 가운데 한곳으로 선비들의 은둔처로 각광받았다. 그만큼 선비들의 교류가 잦았고 번성했다고 한다.
예천군 하리면 대제리(큰맛질)에서 제곡리(작은맛질)를 지나 반두들고개를 넘으면 금당실 마을이 있다. 이어 예천 권씨 집성촌인 죽림리를 지나 초간정에 이르는 10여㎞ 길이 '금당'맛질 반서울 길'이다. 곧장 가면 용문면 동로 사부랭이재가 나온다. 이 재는 문경계립령새재로 이어진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한양을 오갔던 옛길이다.
◆음식디미방 저술한 정부인 장씨의 외가가 살던 곳
맛질은 도로를 경계로 큰맛질과 작은맛질로 나뉜다.
예천군에서 하리면 방면으로 9㎞ 정도 가다 보면 도로 오른쪽으로 높은 산이 에워싼 가운데 큰 들이 펼쳐져 있는 마을이 보인다. 바로 큰맛질이다. 함양 박씨 주부공 종가의 작은 집에 해당하는 미산고택이 마을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미산고택은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으며, 대원군이 미산재라고 현판을 써 주었다고 전해진다.
큰맛질에서 용문면 방면으로 하천을 지나면 용문면 제곡리 작은맛질이다. 안동 권씨 복야공파의 야옹 권의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사는 마을이다. 동양 최초의 음식조리책 '음식디미방'을 지은 정부인 장씨의 외가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장씨 부인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와 맛질의 요리를 배워 익혔을 것이다.
작은맛질에 들어서면 안동 권씨 입향조 야옹 권의를 모시는 야옹정이라는 사당이 눈에 띈다. 춘우재종택과 연우고택은 권의의 후손들이 지은 것으로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다.
마을에서 나와 우측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방두들고개를 넘으면 큰 고건축물이 웅장한 초정서예관이 눈에 띈다. 현존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필이자 5대 국새의 글자를 새긴 초정 권창륜 선생이 원장이다. 이곳에서는 초정 선생이 직접 이론 강의와 실기 지도를 한다. 또 귀중한 서예유물들도 상시 전시돼 있다. 인근 금당실문화마을과 영주 소수서원, 선비촌, 안동 하회마을과 도산서원 등과 연계한 유교문화 관광코스로도 인기가 높다.
◆7㎞ 길이의 돌담길을 걸으며
기와집이 즐비하고 돌담장이 7㎞나 이어지는 전통마을인 금당실은 300여 가구가 넘는다. 시골 동네가 이렇게 큰 곳이 있을까. 마을 안에 들어가면 길을 헤매기 일쑤다.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 했던 십승지지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전통마을이다. 아름다운 주변경관과 지형으로 외지인의 발길이 이어진다.
특히 마을 방풍림으로 '쑤'라고 불리는 800m가량의 소나무 숲 '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은 금당실 마을의 자랑거리이다.
금당실 마을의 특징은 아름다운 고택과 채소밭 사이로 굽이굽이 이어지는 키 낮은 돌담길이다. 투박한 돌들을 낮게 쌓아올린 돌담 너머 고택과 마을 집들의 살림살이가 한눈에 비친다. 367가구가 거주하고 있을 정도로 마을 규모가 크다. 돌담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막돌담장과 토석담장, 기와담장 등 낮은 돌담이 정겹다. 돌담 사이로 텃밭이 있고 고샅길이 구불구불하다. 나무지게 너비의 지겟길 돌담은 60년대의 추억을 회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전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긴 돌담길과 함께 99가구의 전통가옥이 만들어내는 풍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금당실정보화마을 여은경 씨는 "금당실에는 돌담길, 초간정, 용문사 등 많은 볼거리와 솟대'밀납초 만들기, 초간정 흔들다리 등 체험거리도 다양하다"며 "여름 휴가철을 맞아 맑은 계곡과 이웃사촌간의 정, 그리고 옛날 양반 생활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금당실이 가족단위 피서지로 최고"라고 말했다.
마을이름인 '금당실'은 금당곡 혹은 금곡이라고도 한다.
박기준 문화관광해설사는 "이곳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달구리재(학명현)가 앞에 있고 개우리재(견곡현)가 오른쪽에 있으니 중국의 양양 금곡과 지형이 같다'고 해 '금곡'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말했다.
경북 북부 유교문화권 중 안동과 더불어 핵심을 형성하고 있는 정감록의 십승지지 중 한 곳으로서 고택, 고가옥과 많은 종택이 잔존되고 있는 양반문화의 집적지 중 하나로 꼽힌다. 한때 1만여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거주할 정도로 위세를 보였으며, 5일장이 개최될 정도로 상업교류의 중심마을이기도 했다.
금당실 마을에서는 벼농사 외에 양봉, 양파, 마늘, 고추, 상황버섯 등의 농특산물도 생산'판매하고 있다. 또 다양한 고택민박도 가능하다.
◆우리나라 최초로 백과사전을 저술한 권문해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금당실 송림에서 서쪽 방면으로 하천을 건너면 초간 권문해 선생이 태어난 죽림리(竹林洞'대죽마을)가 나온다.
죽림리는 예천 권씨 집성촌으로 명당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저술한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1534~1591)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초간은 1560년(명종 15) 문과에 급제해 좌부승지'관찰사를 지낸 뒤, 1591년(선조 24) 사간(司諫)이 됐다. 일찍이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해 학문에 일가를 이루었고, 서애 류성룡'학봉 김성일 등과도 친교가 두터웠다.
초간은 죽림동에 머물며 매일 북두루미산의 산자락을 따라 초간정사를 오갔다. 그 예던 길은 사색의 길이고 명상의 길이었다. 지금은 옛길의 자취가 희미해지고 말았다.
죽림마을-가목이-남티 작은고개-사시나무골-초간정사로 이어지는 예던 오솔길이다. 지금은 강변 갈대와 찔레, 이름 모를 꽃들이 옛길을 막고 있다.
죽림리에서 용문사 방면으로 3㎞ 정도를 가다 보면 도로 왼쪽으로 원림 숲속의 큰 암반을 물이 돌아나간다. 초간정이다. 정자의 처음 이름은 초간정사였다. 나중에 초간정으로 불리게 된다. 정사의 이름은 초간이 당시(唐詩)에서 따 왔다. 16세기 영남 사림파들의 삶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이 정사에서 초간의 외아들 권별은 해동잡록을 저술했다. 권별은 예천군 최초의 사액서원이던 정산서원의 원장도 지냈다.
초간정을 지나면 문경의 동로면 경천댐 가는 길과 용문사 가는 세 갈래 길이 나온다. 북쪽 계곡을 따라 3㎞ 정도 오르면 용문사 입구다.
용문사는 예천읍에서 북쪽으로 15㎞ 떨어진 용문면 내지리 북쪽 소백산 기슭, 해발 782m의 용문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대장전과 윤장대, 목불좌상과 목각탱 그리고 용문사 교지 등 보물 4점을 간직하고 있다.
고즈넉한 산사, 하늘을 날 듯이 높이 솟은 부연 끝 풍경소리는 아름답다 못해 경외스러움을 자아낸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용문사를 일러 울창하고 경치가 좋은 사찰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예부터 이름난 절이었던가 보다.
박기준 해설사는 "신라 경문왕 10년(870) 당대의 고승 두운선사(杜雲禪師)가 절을 짓기 위해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곳에 들어갈 때, 용이 산 입구에 나와 환영했다 해 용문사라 지었다고 1185년 이지명이 지은 '중수용문사기'에 새겨져 있다"고 말했다.
정감록의 십승지지 중 한 곳인 '금당'맛질 반서울'은 수많은 고택과 고가옥, 종택이 잔존하는 양반문화의 집적지 중 하나다. 500여 년 전 함양 박씨, 원주 변씨, 안동 권씨, 예천 권씨, 의성 김씨 등 5개 성씨가 혼인으로 인척관계를 맺어 집성촌을 이뤘다. 수만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했고, 상업교류의 중심마을이기도 했다.
큰맛질-작은맛질-능곡리-금당실-죽림리-초간정으로 이어지는 총 10㎞의 이 길은 옛 선조들의 사색의 길이고 명상의 길이었다. 또 금당실에서 동로 사부랭이재를 넘으면 문경계립령새재가 나온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한양을 오갔던 옛 길이다.
박기준 해설사는 "예천지역에는 금당실 가서 옷 자랑 하지 말고, 구례 가서는 집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전해진다"며 "금당'맛질에는 재력 있는 선비들과 비옥한 농경지가 많아 마을이 크게 번창했으며 그만큼 한양과의 교류도 많았다고 해 이곳을 '금당'맛질 반서울'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예천'권오석기자 stone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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