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집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요소에 의(衣), 식(食), 주(住) 중 가장 많은 비용이 드는 부분이 바로 주거 분야이다. 길에서 밤이슬 맞으며 노숙하는 이들을 빼고는 제 몸 하나 누일 작은 방 한 칸 없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어떤 형태의, 얼마나 큰 집에서 사느냐에 따라 그 비용은 하늘과 땅 차이가 된다. 누군가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요,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잡을 수 없는 '꿈'이기도 한 집. 그 '집' 때문에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는다.
그런데 세상의 흐름에 따라 '집'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급변한다. 한때는 '로또'와 마찬가지로 인식되던 내 집 마련의 꿈이었지만, 요즘은 "내 집 마련에 목매며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유목민이 되겠다"며 '전세족'의 삶을 택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집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한때는 부동산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특히 아파트는 가격이 크게 급등하면서 재산을 늘리는 투자나 심지어 투기의 대상으로 인식돼 왔다. 아파트는 1960년대부터 새롭게 등장한 주거 수단이었다. 급격한 도시화'산업화로 도심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좁은 땅 안에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공동주택만이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아파트 가격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후반, 그리고 2001년 말 3번의 급등기를 맞이하게 된다. 1970년대 말에는 중동 특수로 벌어들인 오일달러가 시중에 풀리는 것과 함께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고, 1980년대 말에는 금리'환율'물가 등 3저 호황에 따른 대규모 국제수지 흑자로 시중에 돈이 넘치면서 부동산 값을 밀어올렸다. 또 2001년 말에는 서울 강남 아파트를 중심으로 부동산의 양극화 현상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부동산 호황과 함께 전국에 아파트가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주거 형태는 도시의 슬레이트 집에서 단독주택으로, 아파트로 그 형태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부동산 가격 상승과 맞물리면서 아파트 청약 당첨은 마치 '로또'를 거머쥔 것과 마찬가지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자고 나면 가격이 치솟는 아파트 가격은 사람들에게 '부동산 불패'라는 꿈을 안겨줬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서민들이 중산층 반열에 진입하는 상징이었으며, 이를 통해 가계의 부를 늘려가는 가장 큰 재테크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부동산 신화'는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와 2008년 하반기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그 거품이 사그라지고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가격이 내리막을 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이제 부동산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이야기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아파트 시장에서 이런 분위기가 확연하게 감지되고 있다. 가격 거품과 함께 분양가, 크기에 있어서도 몸집 불리기만을 계속해 왔던 아파트들이 이제는 화려한 겉치장을 싹 걷어내고 '실속'이라는 단어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분양을 마친 대구 달서구 감삼동 '삼정 브리티시 용산'을 비롯해 상반기 분양했던 수성구 '범어숲 화성파크S', 동구 '이시아폴리스 더샵 2차' 등의 단지는 중소형대의 사이즈와 저렴한 분양가로 각광받았다. 이제는 '투기'를 하는 시대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투자'의 개념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화성개발 도훈찬 사장은 "지금까지는 업체가 주도하는 '분양'시장이었다면 이제는 소비자가 주도하는 아파트 시장으로 재편돼 가는 과정이라고 봐야 한다"며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평형대와 합리적인 가격 수준이라는 조건에 맞지 않으면 수요자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욕망을 버리면 여유가 보인다
맞벌이 부부 김채훈(36) 씨는 '내 집 마련'의 꿈을 과감히 포기(?)했다. 언젠가 집을 살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생기면 모르겠지만, '집 장만'이라는 지상과제에 매달려 현재의 삶을 올인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100㎡ 남짓한 아파트 한 채 가격이 2억원을 넘어서는 시대. 내 집 마련에 목을 매다가는 늘 여유없이 쪼들리는 삶을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대신 김 씨는 공연을 좋아하는 아내와 충분한 문화생활을 즐기고, 딸을 영어전문어린이집에 보내는 등 교육에 과감한 투자를 하고 있다. 김 씨는 "남들이 보면 내 집 한 칸 없는 전세살이 신세일지 모르지만, 현재의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며 "내 이름으로 된 등기부 종이 한 장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는 대신 많은 여유를 얻게 됐다"고 했다.
최근 20, 30대 젊은 세대들은 자의든 타의든 '내 집 마련'이라는 기성세대의 오랜 패러다임에 따르지 않는 경우가 꽤 많다. 집 한 칸 장만하느라고 고생고생하느니 임차 생활을 하겠다고 맘먹은 것이다. 이는 부동산 가격이 워낙 고공행진을 할 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런데 집값이 바닥을 쳤다는 분석이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임차'를 고수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더이상 아파트가 수익을 낳는 재테크 수단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창환(33) 씨는 "안정적이라는 조건 하나를 위해 엉덩이에 2억~3억원을 깔고 앉아 사는 것이 아무래도 맘에 들지 않는다"며 "그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한동안은 집을 장만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요즘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파트를 벗어나 자신만의 주거공간을 지향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단독주택이나 전원주택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2년 전까지 남구 대명동 단독주택에 살다 아파트로 이사했다는 구모(53) 씨는 다시 단독주택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부지런히 발품을 팔고 있다. 아파트가 편리하다는 말에 20년 가까이 살아온 단독주택을 팔았지만 내 집을 가꾸는 재미가 영 떨어진다는 것이다. 단독주택 매매가로는 작은 아파트 겨우 하나 구할 수 있는 가격 차도 문제가 됐다. 구 씨는 "아파트에 살다 보니 생활의 여유마저도 없어지는 느낌"이라며 "조금 불편하더라도 나만의 공간이라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단독주택으로 돌아가자고 아내와 합의했다"고 했다.
성주에 살고 있는 최모(51) 씨는 20년 전부터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최 씨는 "당시 아파트 가격이 워낙 치솟은데다 가계 형편이 갑자기 좋지않아지면서 대구에서는 도저히 집을 마련할 여유가 되지 않아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이제와 돌이켜보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도시의 편리함을 포기하는 대신 생활비 적게 드는 농촌에서 사교육 없이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경제적 여유가 생기게 됐고, 이제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에서 노후 생활을 안정적으로 즐길 수 있는 자신감도 갖게 된 것. 최 씨는 "몇 년 전 민박 영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벌이가 쏠쏠해 지난해에는 아예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며 "만약 도시에 살았다면 정년을 10년 가까이 남겨둔 채 직장생활을 포기할 생각을 하지 못했겠지만 욕심을 버리니 또 다른 길이 보이더라"고 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이택붕 대구시건축사회 회장은 "과거 주거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면 앞으로는 삶의 질이 중심이 되는 가치 중심의 형태로 발전할 것"이라며 "아파트 일변도의 주거 문화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활방식에 맞는 다양한 주거형태를 추구하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애증의 대상이자 신분의 상징
하지만 여전히 '집'은 대한민국 대다수의 사람들이 '꿈'을 투영하는 로망이요, 애증의 대상이다. 특히 부동산 붐을 타고 '대박'을 꿈꾸며 대출까지 받아 투자했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하우스푸어'(housepoor'집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은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속골병'의 대상이다.
좀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기 위해 2억원의 대출을 받아 집을 샀던 공무원 박모(46) 씨는 최근 몇 년 동안 집값이 계속 하락하면서 결국 수천만원의 손해를 봤다. 원래 살던 아파트는 팔고, 더 넓은 아파트로 옮겨가면서 재산을 불릴 생각이었지만, 대형 아파트 가격이 추락을 계속하면서 결국 '늪'에 빠져들고 만 것. 더구나 분에 넘치는 큰 아파트 탓에 생활비 지출도 늘어 가계는 늘 쪼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박 씨는 "아파트 거래가 뚝 끊기면서 기존에 살던 아파트가 팔리지 않으니 결국 대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헐값에 매매를 하고 말았다"며 "그 과정에서 이자는 이자대로 손해를 보고, 아파트는 샀던 가격에도 못 미치는 헐값에 팔아 이래저래 손해만 막심하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하우스푸어는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분양대행사 리코C&D 전형길 대표는 "워낙 학습효과가 강하다 보니 앞으로는 '묻지마 투자'를 하는 이들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에게는 집이 '신분의 상징'이기도 하다. 평생을 남편의 직장이 있는 대구 북구에서 살아왔던 조모(53'여) 씨는 지난해 아파트를 수성구로 옮겼다. 자녀의 결혼을 앞두고 아무래도 살고 있는 동네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조 씨는 "아무래도 사람들은 어느 동네에 살고 있는지를 통해 그 사람의 생활수준을 가늠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그런 편견을 무시하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권선영 왕비재테크 대표는 "우리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어디에 사세요?'를 물어보는 경우가 많은 만큼 사는 집을 통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업그레이드시키고, 평수를 넓혀가면서 열심히 살아온 삶에 대해 자기만족하는 심리가 있다"고 해석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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