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 공중 시찰을 많이 했다. 그만큼 지리에 밝았고, 전에 없던 시설물 같은 것이 보이면 궁금해하였다. 그럴 때는 수행과장이 지상으로 무전 연락을 해서 상황을 파악해 보고하였다. 그날 대통령의 옆자리에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의 주무 장관인 이희일 농수산부장관이 앉았다. 그 뒤로는 김계원 비서실장과 차지철 경호실장, 그리고 서석준 경제수석비서관이 자리 잡았다.
비행 중에 박정희 대통령은 쌍안경으로 지상을 두루 살폈다. 반월공단 위를 지날 때에는 자신이 펼쳐보던 지도와 일일이 대조하기도 했다. 아산 화력발전소 공사장에서 굴뚝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가리키며 "이곳은 공장입지가 좋은 곳"이라고 설명하였다. 김계원 실장은 대만 대사로 오래 근무하느라 국내 사정에 어두웠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그동안의 업적을 자랑하듯 지상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경지정리가 잘 돼 있고, 막 추수가 끝난 농촌지역은 평화로웠다.
헬기가 당진'예산 상공을 지날 때 김계원 실장은 대통령에게 말을 건넸다. "각하, 초가가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저기에는 아직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대통령은 "우선 큰길가부터 하고 있다"며 씨~익 웃었다.
대통령 일행을 태운 3대의 헬기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장인 당진군 신평면 운정리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 2분이었다. 헬기는 새로 닦은 포장도로 위에 착륙했다. 헬기에서 내린 대통령은 도열한 현지 주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답례를 했다. 넓은 빈터에 설치된 단상까지 약 50여m를 걸어서 단상으로 올라섰다. 관계 공무원들과 근로자들이 도열해 있었고, 행사장 앞줄에는 한복을 입은 노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방조제 건설 유공자를 표창한 뒤 치사(致辭)를 낭독했다. "국토개발이 국력의 원천이며, 오는 1983년부터는 홍수와 가뭄이 없는 농촌이 될 것"이라고 연설하였다.
치사를 마친 대통령은 단상에서 내려와 테이프 절단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참석자들의 환호에 답했다. 그날 맨 앞줄에 참석한 노인들 가운데는 갓을 쓴 이들도 보였다. 대통령은 동행하던 측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고을의 원로 어른이 어디 계신가. 이런 경사에 같이 모셔야겠지. 가서 모시고 오게."
천병득 수행과장은 즉시 무전으로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 손수익 충남도지사도 부하 공무원들에게 재촉했다. 이들이 마을 이장을 통해 원로를 찾는 사이에 대통령은 노인들이 서 있는 곳에 다가가 "연세가 제일 높으신 분은 나오셔서 저와 함께 테이프를 끊으시지요"라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테이프 절단식장은 방조제 입구에 마련되어 있었다. 대통령은 가위를 받아 이희일 장관 등 관계 공무원들과 함께 테이프를 자르기 위해 줄을 섰다. 그 사이에 함덕읍에 사는 이길순(당시 83세) 노인이 그날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연로한 분으로 밝혀졌다.
하얀 턱수염에 돋보기를 끼고 새마을 모자를 쓴 한복 차림의 노인은 몸 둘 바를 모르며 대통령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대통령보다 작은 체구의 노인은 주위에서 급히 마련해 준 흰 장갑과 가위를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대통령은 한 손으로 노인이 자를 오색 테이프의 한 허리를 들고 미소를 머금은 채 잠시 기다렸다.
긴장한 노인의 오색 테이프는 좀처럼 잘리지 않았다. 대통령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가위질을 도와주었고, 주위에서 박수가 터졌다. 대통령은 자리를 뜨지 않고 잠시 노인의 등을 어루만지며 "올 농사는 잘 지으셨겠지요. 댁내도 모두 편하시고?" 하며 안부를 물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버튼도 같이 누르시지요" 하며 노인을 끌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배수갑문을 여는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을 찍은 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사진이 되고 말았지만, 버튼을 눌러도 삽교호의 물이 갑문을 통해 서해로 빠져나가는 장면은 둑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은 옆에 있던 이희일 장관에게 "어디야, 어디야?" 하면서 두리번거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배수갑문이 열린 삽교천 방조제 위로 걸어가 갑문 사이로 물이 빠지는 것을 구경했다. 그리고 이희일 장관과 함께 승용차로 3천360m의 방조제 위를 달렸다. 건너편 아산군 쪽에 도착한 박정희 대통령은 담수비(湛水碑)를 제막했다. 물개 3마리가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모양이었다. 비석을 감싼 흰 천이 세찬 바람에 휘감겨 대통령이 줄을 잡아당겨도 벗겨지지 않았다. 경호원들이 비석 위로 올라가 천을 벗겨 내렸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