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가거도, 놀라운 은총 <하>

푸짐한 생선회에 등산'트레킹 계획은 지켜지지 않아

가거도(可居島)는 사람이 살 만한 섬이라서 그렇게 이름붙였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정말 살 만한 곳은 그런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다분히 역설적이다. 그것은 한때 농협 창고벽에 '농협은 농민의 것', 세무서 담벽에 '공평과세', 파출소 이마에 '민중의 지팡이'라고 써 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주술과 부적의 힘이 현실에 도움은 되지 못하더라도 마음에 위안은 되는 법이다. 싸움에 지고 있는 병사가 '나는 이길 수 있다'고 스스로 주문을 외어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가거도 사람들이 섬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도 미래에 운명을 걸었기 때문이다.

가거도는 만만찮은 섬이다. 4시간 이상 걸리는 뱃길이 우선 멀고 파도가 드세다. 배를 타고 드나드는 것이야 어지럼 멀미 끝에 몇 번 토하고 나면 해결되겠지만 농토와 텃밭 마련이 쉽지 않아 자급자족이 어렵다. 거기에다 태풍이 오거나 비바람이 불어 뱃길마저 끊기고 나면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그래도 그들은 살아보면 살 만하다고 자위하며 산다.

이곳 섬사람들의 든든한 버팀목은 땅이 아니라 바다다. 물론 땅에서도 약재인 후박나무를 비롯한 약초가 자라고 섬을 둘러싼 아름다운 바위 경관이 관광객들에게 좋은 눈요깃감이 되고 있지만 그것이 생활을 윤택하게 해 줄 충분한 자양분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바다는 다르다. 무대의 장면 따라 배우가 바뀌듯 철따라 고기의 어종이 바뀐다. 먼바다에서 찾아온 고기들은 낯가림을 하지 않고 낚시꾼들이 던지는 미끼를 덥석덥석 물어준다. 가거도는 수족관에서 외바늘낚시로 월척 붕어를 끌어올리듯 물때가 좋을 땐 프로와 아마추어 가릴 것 없이 무겁도록 고기를 건져낼 수 있다.

뱃전에서 만난 잘 아는 낚시가게 주인은 민박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자 내 손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오른쪽은 냉장 칸, 왼쪽은 냉동 칸입니다. 냉장 칸에는 항상 2마리 정도의 농어를 넣어두고 낚시를 다녀오면 방금 잡은 고기로 바꿔 놓겠습니다. 떠날 때까지 농어회나 실컷 잡수세요." 돈 한 푼 내지 않고 최고급 생선회를 무진장 먹을 수 있다니 횡재도 이런 횡재가 또 어디 있을까.

우린 가거도에 머무는 며칠 동안 평균 70㎝급 농어 12마리를 먹어 치웠다. 출발할 때의 목표는 독실산을 오르는 것과 섬 주변을 트레킹 형식으로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름난 산악인들도 등산밖에 할 일이 없을 때만 산에 오른다는 것을 가거도에서 처음 알았다.

푸짐한 생선회가 차려진 술상 옆에 고스톱 판이 벌어졌으니 등산화 끈을 조여 매는 대원은 아무도 없었다. 사흘째 되는 날 어선 한 척을 빌려 농어회와 술을 싣고 섬 일주에 나선 것이 가거도에 와서 한 일의 전부였다.

석양 무렵 이층 베란다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옆집 민박 팀들이 엄청 큰 광어 한 마리를 들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안 그래도 농어회만 먹었더니 물리는 감이 없지 않았는데 싱싱한 광어를 보니 새삼 군침이 돌았다. 그렇지만 얻어먹을 구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번개 같은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갖고 다니는 회칼 세 개를 챙겨 아호가 '늘뫼'인 친구와 함께 옆집으로 무작정 쳐들어갔다. "숫돌 있으면 좀 빌려 주세요. 회칼 좀 갈게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민박 팀들은 이렇게 큰 광어를 어떻게 회를 칠 것인지를 의논하고 있었지만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저씨, 이 고기 회 좀 쳐 줄 수 없어예." 그 말이 끝나자마자 광어의 주인은 내가 되고 진짜 주인은 생선회를 배급받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말 그렇구나. 가거도는 사람이 능히 살 만한 파라다이스구나. 칼 한 자루만 쥐고 있어도 생선의 주인이 되는 이 놀라운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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