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혼] 제4부-노블레스 오블리주 <1>경주 최부자(상)

"흉년에 땅 늘리지 말라" 존경받는 富, 대 이어 가르치고 행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격인 경주 최부자집 육훈. 육훈은 집안을 다스리는 지침서이다. 뒤편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되고 규모가 큰 목조 곳간으로 쌀 800석을 수용한다. 흉년이 들 때면 이 곳간이 난민 구휼에 이용됐다고 한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격인 경주 최부자집 육훈. 육훈은 집안을 다스리는 지침서이다. 뒤편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되고 규모가 큰 목조 곳간으로 쌀 800석을 수용한다. 흉년이 들 때면 이 곳간이 난민 구휼에 이용됐다고 한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경주 교동의 골목길. 최언경 이후 최부자 후손들이 거닐던 길이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경주 교동의 골목길. 최언경 이후 최부자 후손들이 거닐던 길이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우리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돈이다. 요즘 정치권에서 한창 불붙고 있는 무상급식이나 반값 등록금 논쟁도 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로 귀결된다. 돈이 권력화하고 있는 셈이다.

돈을 버는 주체는 기업이고, 핵심에는 대주주가 있다. 대체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대주주는 막대한 권한과 부를 누린다.

그런데 사회에 대한 이들의 기여는 어떤가. 기업의 사회공헌은 있어도 기업인 개인의 기여는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선진국의 상류층이라 하면 우리와는 달리 '도덕적 상류층'을 뜻한다. 그들은 재산과 권력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수준 또한 일반 국민에 비해 월등히 높다.

우리 상류층은 돈과 힘과 지위는 있어도 존경받는 경우가 드물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고장의 선조들 중에는 내 것을 아낌없이 내놓으며 국가와 사회와 이웃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도 있었다. 경주 최부자, 안동의 석주 이상룡, 의성의 만송 김대락 등이 대표적이다.

#동학농민전쟁 때 탐관오리와 부자들은 성난 농민들의 타도 대상이었다. 경주지역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만석꾼의 재산을 자랑하던 영남 제일 부자 최부자집은 안전했다.

#6'25전쟁 전후 빨치산들이 전국적으로 부자들을 습격할 당시 경주 최부잣집은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빨치산에 동조하던 사람들조차 최부자집을 성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가난한 사람이 원한을 품지 않는 것보다 부자가 겸손해지는 것이 더 쉽다"고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존경을 받기란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최부자 가계는 어떻게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도 인심을 잃지 않았을까.

◆베푸는 것이 쌓는 것

살림을 크게 일군 최국선에 얽힌 일화다. 임종 때 아들을 불러 서랍에 있던 빚문서를 가져오게 했다. "토지나 가옥 문서를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돈을 빌려준 차용증서는 불태워라. 돈을 갚을 사람이면 없어도 갚을 터이고,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담보가 있어도 갚지 못한다. 형편이 안되는데 문서를 뺏어 뭣하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고 최부자의 가훈이 후손들에게 전승되면서 인심좋은 집안으로 평판나자 소작인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소작료도 다른 지주들이 70, 80%씩 가져가는 것과는 달리 절반 정도만 가져가니 생산성이 더욱 높아졌다.

◆욕심은 금물

최부자집 육훈에는 과욕을 경계한 것들이 여럿 있다.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고,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는 교훈을 대대로 지켰다. 내가 잘살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잘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흉년에는 곳간을 열어 주위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고, 관청이나 향교 등에서도 물품이 필요한 경우 아낌없는 지원을 해서 원성 사는 일을 하지 않았다.

◆아낌없는 기부

만석의 재산을 모두 소진한 사람은 마지막 최부자 최준(1884~1970)이었다. 통상 부자가 사업실패나 도박, 주색잡기로 망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독립운동과 문화예술 창달 및 대학설립에 모든 재산을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한일강제병탄 이후 본격적으로 재산관리를 맡았던 그는 광복을 위해 숱한 독립투사들과 교류하며 자금을 제공했다.

해방 이후에는 대구경북에 제대로 된 대학이 없는 것을 한탄하며 지인들과 함께 대구대(영남대전신)를 설립하는 데 집과 임야,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고서 등을 기부했다.(이 때문에 경주 교동에 있는 최부자집은 학교법인 영남학원 소유로 돼 있으며, 현재 영남대 중앙박물관에는 기증받은 책으로 최준의 호를 따서 만든 문파문고가 있다.)

남아 있던 일부 재산도 6'25전쟁 때 피란왔던 교수 학자들을 위해 세운 계림대학(이후 영남대 합병) 설립에 모두 쏟아부었다.

최정암기자 jeong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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