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플레이오프서 빙그레에 패해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된 삼성 라이온즈는 대대적인 변화를 선택했다. 1985년 전'후기를 석권하며 전대미문의 통합우승을 일궈냈지만, 원년 이후 4번의 한국시리즈 도전(1982'1984'1986'1987년)은 물거품으로 끝났고 1988년에는 한국시리즈 진출마저 놓치며 큰 경기에서 힘을 못 쓰는 징크스가 생겼다. 초유의 그룹 비서실 감사는 삼성에 거대한 폭풍을 몰고 왔다.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이끌려면 큰 경기에 강한 투수가 필요하다'는 감사보고서는 그룹 최고위층으로부터 'OK' 사인을 받아 곧바로 실행됐다. 삼성은 롯데에 제안했다. "김시진과 최동원을 맞바꾸자." 김시진은 당시 111승으로 최다승을, 최동원은 통산 탈삼진 1위를 달리는 삼성과 롯데의 기둥 투수였다. 롯데는 삼성의 엄청난 제안에 귀가 솔깃했다. 롯데는 선수회 파동 후유증에다 국내 최고액의 연봉을 받는 최동원과의 관계가 껄끄러운 때였다.
김시진은 팀의 간판선수였지만 큰 경기서 지독하리 만큼 승운이 따르지 않았다. 1988년 플레이오프 2패는 물론 한국시리즈 8경기서 7패(1984년-2패, 1986년-3패, 1987년-2패)의 기록만 쌓고 있었다. 당시 김시진은 "컨디션이 좋은 편인데도 늘 고비를 넘기지 못한다. 어떻게 된 건지 나도 모르겠다"고 했다.
물밑작업에 이어 1988년 11월 23일 두 구단은 이를 공식발표했다. 이 트레이드에는 삼성의 오대석'허규옥과 롯데 오명록(투수)'김성현(포수)도 포함됐다. 삼성은 '큰 경기에 강한 최동원을 영입, 투수력을 보강하면 큰 득이 된다. 오대석과 허규옥이 좋은 선수지만 강기웅, 최해명 등 대어급 신인 선수들이 입단할 예정인데다 우리 팀에는 류중일, 김성래, 김용국이 버티고 있어 수비 전력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주판알을 튕겼다. 롯데 역시 '최동원과 오명록 두 기둥투수를 내주지만 최대 약점으로 꼽혔던 내야수를 보강해 팀 분위기를 쇄신할 수 있다. 내년엔 박동희가 입단하니 최동원이 가더라도 투수 출혈은 크지 않다'고 내부 결론을 내린 뒤였다.
그날 팀 훈련에 참가하려고 집을 나섰다가 기자들의 전화세례를 받고서야 사실을 알게 된 김시진과 최동원이 받은 충격은 컸다. 두 선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김시진은 "방금 매니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동안 팀에서 연습을 계속해 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충격이 크다. 구단마다 사정이 있겠지만 나는 한국시리즈 여파 때문인 것 같다. 30년간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려니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가물가물하지만, 프로선수라면 어느 팀에 가든 열심히 뛰어 좋은 성적을 내면 된다"고 했다.
최동원은 "아침에 팀 연습을 하러 나가다 보도진의 전화 세례를 받고 트레이드가 된 사실을 알았다. 구단의 공식 통보를 아직 못 받아 뭐라 얘기할 수 없지만, 며칠 조용히 지내고 난 뒤 입장을 밝히겠다. 트레이드는 구단 고유의 권한이다. 섭섭한 생각은 없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겠다. 다만 그동안 성원해 준 부산 팬들을 떠나려니 아쉬울 따름이다"고 했다.
팬들에게 김시진은 '대구사람=삼성 라이온즈', 최동원은 '부산사람=롯데 자이언츠'였다. 대구 팬들은 '삼성 자이언츠'가 됐다고 비난했다. 팬들의 항의 전화가 구단 사무실에 빗발쳤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해를 넘겨 1989년 초. 최동원은 잠적한 뒤 은퇴를 표명했다. 팀 훈련에 합류하지 않고 계약협상도 벌이지 않았다. 삼성은 "우리 전력으로 최동원이 없어도 무난히 플레이오프 티켓(1~4위)은 따낼 수 있다. 최동원은 막판 한국시리즈용으로 트레이드한 것이다"며 여유를 부렸다.
당시 경기부장이었던 김종만 대구시야구협회장은 "최동원은 1989년 시즌이 한참 지나고 나서 삼성 옷을 입었다. 그는 트레이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몰래 어깨 수술을 받았다. 치료와 재활 때문에 시간을 끌었던 것이 나중에 들통났다"고 했다.
팬들의 거센 반발에 삼성 윤경헌 단장은 "더는 트레이드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롯데가 삼성에 구애를 했다. 그 대상은 김용철이었다. 구단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김용철도 타 구단 이적을 구단에 요청한 상태였다. 김시진-최동원 때처럼 이름에 걸맞은 상대가 필요했다. 삼성은 장효조와 장태수(투수)를 내놓으며 롯데에 이문한(투수)을 요구했다.
1988년 12월 20일. 2차 폭풍이 또 한 번 프로야구계를 강타했다. 이는 어느 정도는 예상됐던 트레이드 카드였다. 삼성은 1988년 초 연봉 재계약 갈등을 빚은 장효조를 공개적으로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겠다고 밝혀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롯데도 선수회 파동으로 김용철을 트레이드하기로 결심을 하고 있던 차였다.
1983년 입단한 장효조는 1984, 1988년 시즌만 빼고 타격왕 타이틀을 독차지했고 통산 타율이 0.350에 이른 국내 최고의 타자였다. 김용철 역시 통산 타율은 0.289였지만 장타력에서는 장효조를 앞서고 있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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