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깨지는 낭만

지금 50대의 깨복쟁이 때는 여러 가지가 힘들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로 붙들려가던 군사독재 시절에다 먹고살기도 어려웠다. 끼니때에 맞춰 이집저집을 기웃거리는 거지가 많았고, 쌀과 밀, 옥수수 등을 섞어 만든 막걸리 한 사발로 한 끼를 해결하는 이도 적잖았다. 그래도 대개 주변이 엇비슷해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때의 지식은 교과서 아니면 교실 뒤편에 있던 학급문고를 통해 얻었다. 말 나오는 기계인 라디오는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고, 그림이 나오는 TV는 가진 이가 드물었다. 학급문고라는 것도 집에서 보던 책을 세금 거두듯 강제로 가져오게 해 만든 것으로 규모도 작고, 대부분 낡은 위인전 정도였다. 괜찮은 집 아이들은 새소년이나 어깨동무 같은 잡지를 보았다. 이를 자랑하려고 잡지를 학교에 가져오는 날에는 서로 빌리려고 다툼이 벌어지고 주인 마음대로 순서를 매겨 번갈아 보게 했다.

새소년과 어깨동무는 연재 만화도 재미있었지만 그야말로 지식의 보고였다. '세계의 미스터리' '7대 불가사의' '충격! 우주인의 정체' 같은 것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제목도 '신비'나 '비밀' 같은 우리 낱말보다는 영어인 '미스터리'가 훨씬 잘 어울렸다. 단순한 신비를 넘어 뭔가 기괴하고 무서워서, 알아서는 안 될, 혹은 가슴을 쿵쿵거리게 하는 어떤 것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그 중 가장 무서웠던 것은 영국 네스호의 괴물이었다. 공룡처럼 긴 목을 가진 괴물을 찍은 흐릿한 흑백 사진은 오랫동안 목덜미를 서늘하게 했다.

최근 미국의 한 인터넷 사이트가 확인되지 않은 괴생명체의 사진을 찍어 올리면 희귀성 여부에 따라 2천 달러의 상금을 준다고 한다. 이미 여러 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어릴 때 사진만으로도 무서워 밤잠을 설치게 했던 네스호 괴물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현대의 과학기술로 달려들면 못 밝힐 리도 없겠지만 일부러 밝히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뭐든지 낱낱이 까발리는 것보다는 몇 개쯤은 그냥 '미스터리'로 남아있길, 그래서 어린 시절의 낭만으로 기억하고 싶은 심리일지도 모르겠다. 상금까지 걸며 하는 괴생명체 찾기 작업이 어쩌면 어린 시절 낭만 죽이기가 아닌가 싶어 씁쓸하다.

정지화 논설위원 akfmcp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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