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고지전…미칠 것 같은 긴장, 싸워야 할 것은 적군 아닌 전쟁

장훈 감독의 '고지전'은 휴전을 앞두고 동부전선의 한 고지를 사수하려는 국군과 인민군의 공방전을 그린 영화다.

1953년 2월. 방첩대 중위 강은표(신하균)는 협상 중 실언으로 인해 동부전선에 배치된다. 국군 내부에 인민군과 내통하는 반역자를 색출하라는 임무다. 인민군의 편지가 국군우편으로 배달된 것이 포착됐고, 중대장의 죽음 또한 미심쩍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전쟁 초반에 죽은 줄 알았던 옛 친구 김수혁(고수)을 만나고 헤어질 때 유약했던 수혁이 중위로 진급해 악어부대를 장악한 카리스마적인 모습에 놀란다. 최전선이면서도 병사들의 모습은 오합지졸처럼 보인다.

욕을 달고 사는 오 중사(류승수),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인민군 행색의 양 상사(고창석), 이등병이었다가 대위로 진급한 의문의 신 대위(이제훈), 다른 중대 소속의 미친 병사(정인기)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까지 진지를 뛰어다닌다. 은표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악어중대의 비밀에 서서히 접근해간다.

한국전쟁은 3년 전쟁 중 2년간이나 지루하게 휴전협상이 진행됐다. 전투는 교착에 빠지고,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국군과 인민군은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고지 탈환전을 벌였다.

'고지전'은 그 틈바구니에서 희생된 군인들을 통해 전쟁의 허망함을 그려내려고 했다. 전쟁에 염증을 느낀 은표의 눈을 통해 미쳐버릴 것 같은 전장의 긴장, 적군이 아니라 전쟁과 싸워야 하는 군인들의 인간적 갈등, 그 사이에 어두운 기억과 상처 등을 건드리고 있다.

일단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롯해 지난해 '포화속으로'까지 실감나는 전투장면을 그린 한국영화의 기술적 발전을 '고지전'에서도 잘 느낄 수 있다. 육중한 총격과 폭파, 진지 사이를 비좁게 달리며 찍는 카메라, 수십 번도 넘게 주인이 바뀌는 고지를 한 장소에서 찍어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등 외형은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좁고 깊은 진지 속을 역동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가마에 카메라를 장착한 듯한 '가마캠'도 시도됐다.

그러나 10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고지전'은 진지의 전투장면 외에는 그다지 새롭거나 흥미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

고지를 사수하려는 군인들을 통해 전쟁의 참상과 비인간성을 그려내려고 한 모양인데, 오락가락하는 이야기 구조에 들쑥날쑥한 캐릭터, 감성에 기댄 대사에 80년대 TV 드라마 '전우'를 보는 듯한 평면적인 시선이 안타까움을 준다.

도입부는 마치 전장을 배경으로 한 수사물을 보여주는 듯하다. 첨예한 고지전 한가운데서 적과 내통하는 위장 간첩을 찾아라. 이것이 은표의 임무다. 그가 고지에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그러나 곧 그 이유가 밝혀지고, 그때부터 이야기는 전쟁 병기가 된 친구와 갈등으로 선회하다가 인민군과의 휴머니즘도 건드리고, 악어중대의 어두운 이면까지 들추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몇몇 캐릭터의 경우 인물 성격변화에 대한 설명이 없지만 인민군과의 관계에서는 과잉감정으로 그려내는 등 산만하기도 한다.

시나리오를 쓴 박상연 씨는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남북분단의 아픔을 상징적으로 잘 그려낸 작가다. 그러나 '고지전'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주제의식을 주입하려는 경향을 보여주면서 스스로 그것을 희석시켜버리는 경향을 보여준다. 장훈 감독 또한 '영화는 영화다'에서 보여준 치밀함은 없이 플래시백의 설명조로 안일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고지전'은 왜 휴전선이 그렇게 그어졌는지 젊은 관객에게 잘 알려주는 영화다. 그러나 여러 영화에 등장했던 인물들을 얼기설기 엮은 패치워크같은 영화다. 거액의 제작비가 들었다고, 억지로 2시간을 넘기는 것, 이 또한 관객에 대한 폭력이다. 7월 20일 개봉. 상영시간 133분. 15세 이상 관람가.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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