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기 싫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누구나 좋아하는 대중예술이니만큼 항상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케이블TV의 채널을 돌리다보면 종종 영화전문채널에서 방영하는 재밌는 영화도 건질 수 있고, 정규방송도 토'일요일에는 주말의 명화를 방영한다. 게다가 특선영화가 없는 명절은 상상할 수가 없다.
하지만 정말 영화의 참맛을 느끼려면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 최고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간혹 즐거워야 할 영화관에서의 영화 관람이 실망스럽게 끝날 때도 있다. 기대했던 영화가 무척 지루했다거나 유치해서 씁쓸하게 자리를 떠야했던 경우가 그렇다. 반면에 시간과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은 명작도 있다. 명작 영화는 화려한 영상이나 유명 영화배우들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예술적으로 담겨져 있다.
한국영화계의 명장 임권택 감독의 작품들이 그렇다. 그의 작품세계에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액션도, 첨단기술을 사용한 환상적인 영상도 없지만, 한국의 고유한 정서를 자신만의 철학적인 모습으로 그의 영화 속에 담아내고 있다.
수많은 영화제에서의 수상기록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1970년대 중반까지 찍은 수십 편의 영화에 대해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든 '꼴도 보기 싫은 영화들'이라고 자평하는, 솔직함과 겸손함을 갖춘 임권택 감독. 지금까지 그가 제작한 영화는 무려 101편에 이르는데, 영화가 곧 자신의 삶이자 전부인 그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임권택(林權澤)은 1936년 5월 2일 전남 장성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할아버지 덕에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좌익 활동에 가담했던 아버지와 이를 못마땅해했던 할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한 집안 분위기가 싫어 18살에 부산으로 가출했다. 아마도 그가 부산으로 가출한 것은, 그 당시 한국전쟁으로 부산이 임시 수도였고 큰 도시로 가야 출세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출 당시 피란민들로 북적이는 부산에서 그는 지게꾼 일도 했고, 며칠씩 굶으며 노숙을 하기도 했다. 몸과 마음이 힘들던 그때, 인연이 된 사람들이 군화 장수였다. 당시 군화는 질기고 품질이 좋아 군화 장수들은 많은 돈을 벌었고, 수도 서울로 올라간 군화 장수 몇몇이 영화제작에 참여해 '장화홍련전'을 촬영하면서 임권택을 합류시켰다. 정창화 감독 밑에서 연출을 배운 지 5년 만에, 임권택은 27세의 젊은 나이에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의 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
세계의 영화인들이 인정하는 영화감독 '임권택'. 그의 이름은 아마도 돌림자가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음운에 목(木)과 화(火)의 기(氣)가 강하다.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창의력이 뛰어난 이름이다. 목은 식신(食神)으로 작용하고, 화는 비견(比肩)으로 작용한다. 비견은 말 그대로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뜻이다.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말이다. 사람이 많다는 것은 나누기를 좋아하고 인심이 좋다는 것이다. 비견은 재성(財星)을 방해하여 재물과는 인연이 멀어진다. 그러나 식신을 만나면 식신에 동화(同化)되어 그 힘이 강해지니, 창작능력과 풍부한 표현력이 생명인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에 딱 맞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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