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종욱의 박정희 이야기] (36)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 "응, 나는 괜찮아…"

1979년 10월 26일 저녁, 청와대 앞 궁정동 식당에서 대통령 일행의 만찬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빠른 속도로 술잔을 비웠다. 그는 시바스리갈을 주전자에 부어서 마시고 있었는데, 술잔은 주로 대통령과 김계원 비서실장 사이에서 오갔다.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정보부장은 술잔을 입술에 갖다 대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차지철 실장이 김재규 부장에게 말을 걸었다. 정보부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극적인 말투였다. 대통령은 시국문제에 대해 말을 이었고, 차지철의 계속되는 자극적인 발언으로 해서 무거운 화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차지철 실장은 예의 강경한 말을 이어갔고, 김재규 부장은 대책 없는 비관론을 되풀이하자 대통령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날 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을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오만방자하게도 총질을 했으니 말이다. 대통령은 그 같은 광경을 지켜보다가, "뭣들 하는 거야!" 하면서 벽력같이 한마디를 하고 난 뒤에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대통령은 그 모양을 보지 않으려는 듯 눈을 감고 정좌하고 있었다. 위기일발의 상황에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재규 부장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대통령을 내려다보면서 권총을 발사했다. 그는 지극히 짧은 시간을 머뭇거렸다. 나중에 그가 말했듯이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기 위한' 결심에 필요한 시간이었는지, 자신을 친동생처럼 아껴주면서 과분한 배려를 해 주었던 동향의 선배에 대한 순간적인 주저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한동안 어수선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대통령을 모셔야 할 사람들조차 몸을 피해 달아났다는 사실이다. 한 차례 총성이 멎자 실내 화장실로 피했던 차지철이 문을 빠끔히 열고, 머리를 내밀면서 "각하, 괜찮습니까?" 하고 물었다.

대통령 곁에 있던 여인이 "각하, 괜찮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난 괜찮아" 하고 답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몸에서는 선혈이 쏟아졌다. "각하, 정말 괜찮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더니 "응, 나는 괜찮아…" 그 말이 박정희 대통령이 이승에서 남긴 마지막 육성이 되고 말았지만, 그 당시의 느낌으로는 "난 괜찮으니 너희들은 여기를 빨리 피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증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총탄을 맞은 뒤 고개를 떨어뜨리며 기울어졌는데, 이마가 식탁 위에 닿았다"고 했다. 그 상황에서 김재규 부장은 또다시 대통령의 머리에다 총을 쏘았다.

바로 눈앞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피를 쏟으며 경호실장이 달아나는 혼란스런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계산보다 본능적인 행동에 지배당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태연자약한 행동은 그동안 숱한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 죽음과 친해지고, 그 죽음을 끊임없이 사색하여 친구처럼 되어 버린 사람의 내면화된 사생관(死生觀)과 지도자로서의 신념이 자연스럽게 발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셨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청천벽력 그 자체였다. 1979년 11월 3일 중앙청 앞 광장에서 '故 朴正熙 大統領 國葬永訣式'이 있었고, 최규하(崔圭夏) 대통령권한대행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영전에 바쳤다. 국민들은 오래도록 슬픔에 잠겨 있었다.

지기지우였던 구상(具常'1919∼2004) 시인은 친구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진혼축(鎭魂祝)을 남겼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오랫동안 교우하였을 뿐 아니라, 죽은 뒤 5년 동안 안식을 기원하는 미사를 올렸다.

국민으로서는 열여덟 해나 받든 지도자요/ 개인으로서는 서른 해나 된 오랜 친구/ 하느님! 하찮은 저의 축원이오나/ 인류의 속죄양, 예수의 이름으로 비오니/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고이 쉬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그가 지니고 떨쳤던/ 그 장한 의기와 행동력과 질박한 인간성과/ 이 나라 이 겨레에 그가 남긴 바/ 그 크고 많은 공덕의 자취를 헤아리시고/ 하느님, 그지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 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 그 스스로가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 그가 앞장서 애쓰며 흘린 땀과/ 그가 마침내 무참히 흘린 피를 굽어보사/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길이 살게 하소서.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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