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집의 나라사랑은 시조 초기로 올라간다. 후손들에 의해 최부자집의 중시조로 평가받기도 하는 최진립(1568~1636)은 임진왜란 때 왜적 수백 명이 그의 집에 주둔하자 하인들과 함께 기습해 물리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의 집이 크고 넓어 왜군이 반드시 들러 묵고 갈 것을 예상, 장작과 짚을 집 곳곳에 숨기고 가족들을 대피시킨 뒤 일찍이 당숙으로부터 배운 화공법을 사용해 야간 공격을 감행한 것.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무관에 등용됐고 1594년에는 무과에 급제해 부장 벼슬을 받기도 했다. 왜란이 끝난 후 공적을 논할 때 많은 의병장들이 진립의 뛰어난 공적을 칭송했다.
관직을 고수하던 그는 어쩔 수 없이 벼슬을 맡게 되자 백성들 보살피는 것을 으뜸으로 삼았다. 스스로 근검절약하고 저수지를 보수하는 한편 농기구 등을 정비해 농사를 짓게 하니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광해군 때 모함에 걸려 귀양살이를 하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가덕첨사, 경흥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에도 몇 번이나 벼슬을 고사했지만 고을 백성들이 직접 조정에 청하는 바람에 그대로 머물기를 수차례. 지병으로 사직한 그에게 전라우도 수사가 제수됐고, 뒤이어 공주영장으로 발령받았다.
병자호란 때 69세의 나이로 피난하는 인조를 구하기 위해 남한산성 부근에서 전투를 치르다 장렬히 전사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인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병조판서로 증직하고 '정무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최정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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