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행복을 요리하는 의사] '미안해요' 회진법

말기 암 환자와 보호자는 예민하다. 무조건적인 친절을 요구한다. 의료진은 도와주는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적으로 대할 때도 많다.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과 그 보호자이다. 우리가 잃는 것을 당신들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미워함으로써 해결하는 방법이 분노다. 나는 환자가 말기 암이 되기까지 아무런 책임도 없다. 그렇지만 암에 걸린 억울함과 치료과에서 생긴 불만을 공감하며 들어야 한다. 그런 상담에 익숙하지 못한 초기 호스피스 활동은 실패작이었다. 처음엔 억울했다. 하지만 그것은 해결법이 아니었다. 어찌됐건 의사인 내가 못 살려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기 시작하면서, 분노는 녹기 시작했다.

주제 사라마구가 쓴 소설 '눈 먼 자들의 도시'가 우리 병동 이야기인 것만 같다. 해부학적으로 시신경에 아무 이상도 없이 한 사람만 빼고 모든 도시 사람들이 하나하나 실명한다. 말기 암 환자가 된다는 것과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면 그 충격으로 해부학적인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멀어버린다. 아무리 현명한 방법을 알려줘도 의심한다.

이모(80) 할머니는 담도암 통증이 심해서 입원했다. 입원 후 통증이 없어지자 이상하게도 그녀는 변해갔다. 평소에 너그럽던 그녀가 간병하던 딸에게 짜증을 많이 냈고, 멀리 살던 세 아들과 며느리가 병문안 오지 않는다고 불호령을 내렸다. 교회 집사였던 할머니가 병동에서 예배를 볼 때 남들이 보는 찬송가까지 찢었다. 새벽에는 과도(果刀)를 잡고 욕도 했다. 지금껏 경험상 문제 환자는 없다. 문제 보호자가 있을 뿐이다. 평소와는 다른 과격한 행동장애를 정신과에 의뢰하기 전에 딸과 상담을 했다. 지난 토요일 60세인 큰아들이 시골 할머니 집으로 외출가기로 약속했는데 사정이 있어서 못 왔다고 했다. 그리고 토요일 회진 때 고향으로의 외출을 기다리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당연히 외출을 한 줄 알았다. 이유 없는 분노는 없었다.

아들에게 전화했고, 이튿날 외출 다녀온 뒤 고함소리는 사라졌다. 주치의로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그래도 미안한 것이다. 이렇게 터트리는 환자가 오히려 진료하기가 쉽다. 평생 살던 고향에 가서 마을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 할머니의 편안함을 보고, 가족은 만족했다. 분노를 극복하려면 환자의 병뿐 아니라 그의 인생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화가 나면 그저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해결이 되듯이, 삶의 끝자락에 있는 분노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상관이 없는 환자의 병이지만 무조건 미안하다가 필요하다. 분노는 따뜻함만이 녹일 수 있었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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