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상 백일장] 수필 / 시

수필 #1

♥ 그해 여름

여름철 대표 과일로는 단연 수박이 으뜸이다. 7월 복더위 중 우물에서 건진 어른 머리통만 한 수박을 부엌칼로 숭덩 잘라 정자나무 아래 앉아 한입 베어 먹는 맛이랑, 큼지막한 양재기에 듬성듬성 썰어 넣어 얼음과 더불어 설탕을 버무린 수박화채를 온가족이 대청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숟가락으로 퍼먹는 맛 중 어느 것이 더 나을까?

지금이야 시장에 가면 흔해빠진 것이 수박이다. 하지만 1970년대 초 두메산골에서는 말 그대로 금싸라기처럼 귀한 것이 수박이기도 했다. 어떻게 맛이라도 볼라치면 돈으로 산다는 것은 언감생심, 위험을 무릅쓰고 서리를 해야만 했다. 어쩌다 주인에게 들킬라치면 그 뒷감당은 생지옥이 따로 없다. 결국 보리쌀 두어 됫박을 내주고도 발이 손이 되도록 빌고서야 얼추 끝을 맺는다.

그 시절 그 귀한 수박을 세 끼니 밥 먹듯 먹을 기회가 생겼다. 여름방학을 일 주일 정도 앞둔 그날도 나는 소꼴을 베기 위해 숫돌에 낫을 갈아들고선 집을 나섰다. 한참이나 소꼴에 열중하던 나는 발목이 따끔하여 발을 들자 뱀 한 마리가 발목을 물고는 허리춤까지 딸려오다 뚝 떨어져 저만치 풀숲으로 꼬리를 감춘다. 뱀에 물렸다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나고 아랫도리가 후들후들 정신이 없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별무신통, 약이라곤 민간요법으로 황토를 푼 세숫대야에 발을 담그고 어머니 머리칼 열댓 올을 뽑아 다리 중간 중간 묶는 것이 고작, 약국은 오 리, 병원은 십 리나 되니 늦은 밤중에 찾아보았자 뾰족한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 다음날 이른 새벽 아침밥도 거르신 아버지는 뱀에 물린 데 비약을 찾아 나서지만 별 소득 없이 돌아오셨다. 독이 퍼져 초등학교 5학년 다리는 어른다리보다 굵다. 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제발 살아만 다오!"라고 곱씹으며 고개를 떨어뜨리신다. 다음날 뱀에 물린 덴 수박이 좋다는 말에 보리쌀 두어 됫박으로 고만고만한 수박 반 리어카를 사다가 일찌감치 추수가 끝난 뒤란 딸기덩굴 아래에 청솔가지를 덮어 갈무리한 아버지는 하루에 한 통씩 먹으란다. 그날 이후 아주 요강을 끼고 산다. 께복쟁이 녀석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어 한 숟갈씩 얻어먹은 값으로 방안으로 물외, 자두, 복숭아 등 풋과일이 넘쳐난다. 오늘도 늘어놓은 수박과 과일들을 보면 그때 먹던 수박 맛이 그립다.

이원선(대구 수성구 중동)

수필 #2

♥식당에서 만난 할머니

며칠 전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초라한 차림을 한 80대 할머니가 찾아오셨습니다.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느끼셨는지 할머니는 아무도 없는 구석자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한참 뒤 식당에서 밥을 다 먹고 나오는데 모든 사람이 큰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 할머니가 구석진 자리에서 잔뜩 움츠린 채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는 듯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시던 할머니와 저는 눈이 마주쳤고 저도 모르게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습니다. 그런데 "총각, 여기 밥값 좀 대신 내주면 안 될까?" 사방을 살폈지만 저 외에 남자는 없었습니다.

이 상황을 눈치 챈 저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어깨를 두드리며 "여기 밥값 얼마예요? 제가 대신 낼게요." 주인집 아주머니는 "멀라꼬 이런 데 돈을 쓰는교. 내가 알아서 하면 되는데. 뭐 그래요 그럼."모두들 무심히 할머니 앞을 지나치기에 나라도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해 그냥 지나갈 뻔했다는 마음에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이내 할머니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하시고 자리를 뜨시는 모습을 보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점심 무렵에 할머니께서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날도 점심을 먹으러 식당을 찾은 저를 용케 알아보시고 "저기 총각 이거 받아요."하며 꼬깃꼬깃 접은 5천원 한 장을 내미셨습니다. 일주일 동안 온 동네를 돌아다니시며 폐휴지를 주워서 모으신 돈이라고 하셨습니다. 적은 돈이지만 점심값 5천원을 주기 위해 1시간을 걸어서 식당까지 오신 할머니 생각에 가슴 한쪽이 찡해왔습니다. 맛있는 거 사 드시라고 다시 돌려드렸지만 한사코 거절하셨고 점심이라도 드시고 가시라고 붙잡아도 총각한테 폐만 된다며 이내 자리를 뜨셨습니다. 그날의 일은 아직도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월급을 몇백만원씩 받는 직장인에게는 한 끼 점심값 정도겠지만 제게는 할머니의 수고로 만들어 낸 고귀한 것이기에 세상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합니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류재필(대구 달서구 성당1동)

시 #1

♥ 삶은 너털웃음

시계의 초침처럼 쉼 없이 돌아가는 삶

아웅다웅도

토닥토닥도

삶을 만들어가는 시간들.

매일매일 즐거운 삶이 어디 있으랴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다면

삶은 즐거운 것만은 아니겠지

어제처럼

지금처럼

내일도 또 그렇게 삶의 한 페이지가 지나가겠지

저기 흘러가는 강물처럼 돌아오지 않겠지

삶이란,

그냥 너털 웃는 웃음과도 같다.

마음과 마음이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웃기도

행복하기도 한 삶의 한 페이지들…

평생을 살 것처럼 삶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웅다웅

토닥토닥

그렇게 살아간다.

떠나면 한 줌의 재일뿐인데

삶은 너털웃음과도 같다.

김성은(대구 달서구 이곡동)

시 #2

♥바구미

황토 항아리에

저승사자 같은 바구미가 현미(玄米)를 죽이고 있다.

장마 지나자 활발해진 거동이

독 안에서 당당하다.

바람이 하얀 구름을 떠밀어

하늘이 통째로 움직이는 날

신문활자위로 널브러지는 바구미

'이승이 좋아~'

현미(玄米)의 안간힘도

바구미 지나간 자리 뻥 뚫렸네.

한낱 선풍기 바람에 날아 갈까봐?

쌀 무덤위로 기어오르는 바구미

막중한 임무를 위해,

고지를 향하여

항아리 밖에는

다른 힘이 있었다.

문삼숙(대구 달서구 용산동)

지난주 선정되신 분은 김복순(대구 달서구 이곡동)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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