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혼] 제4부-노블레스 오블리주 <3>경주 최부자(하)

광복후 마지막 만석꾼 최준, 가족 불러 "남은 전 재산 대학에 기부하련

마지막 최부자 최준은 전 재산을 대학 설립에 쏟아부었다. 그가 대구대(영남대 전신)를 만들면서 기증한 각종 서적들은 영남대 중앙도서관에 그의 아호인 문파를 따서
마지막 최부자 최준은 전 재산을 대학 설립에 쏟아부었다. 그가 대구대(영남대 전신)를 만들면서 기증한 각종 서적들은 영남대 중앙도서관에 그의 아호인 문파를 따서 '문파문고'라는 이름으로 보관돼 있다. 이채근기자
경주시 교동 최부자집 본가 옆에 있는 공터. 초가 민박집을 건립하기로 했다가 최양식 시장이 부임하면서 최부자 교육관을 만들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최부자의 산 정신이 후손들에게 전승될 것이다. 이채근기자
경주시 교동 최부자집 본가 옆에 있는 공터. 초가 민박집을 건립하기로 했다가 최양식 시장이 부임하면서 최부자 교육관을 만들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최부자의 산 정신이 후손들에게 전승될 것이다. 이채근기자

'자식에게 많은 재산을 남겨주는 것은 독이나 저주를 주는 것과 같다'며 전 재산을 기부한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수치'라며 전 재산 기부를 약속한 중국의 기부왕 천광뱌오.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자는 운동(더 기빙 플레지)에 동참을 약속한 억만장자(세계 1천 명 중 38명)도 쏟아져 나오는 세상.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기업기부는 늘어도 기업인들이 개인 재산을 기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오히려 온갖 방법을 동원해 부의 대물림에 혈안이 돼 있다.

이런 점에서 약 100년 전부터 시작된 경주 최부자의 전 재산 기부는 가히 혁명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 재산 헌납 결심은 1918년

최준은 만석꾼 지위를 과감히 던지기로 작정했다. 후세 사람들은 최부자가 1947년 대구대(영남대 전신)를 설립하면서 재산 대부분을 기부했다고 알고 있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임에 틀림없지만 최부자의 재산 헌납은 1918년 부산 출신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의 요청으로 백산상회를 설립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이때 선대로부터 내려왔고 자신이 키운 전답과 임야 등을 아낌없이 백산상회에 쏟아붓기로 작정했다. 다만 독립운동 자금원으로 지목되면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친지들까지 모진 고초를 당하기에 백산상회가 은행대출을 받는 형식을 빌렸을 뿐이다. 거액을 대출받을 때 그는 재산을 모두 담보로 잡혔다. 담보액이 3만 석 규모이니 연간 1만 석 소출을 내는 그의 재산 상황으로선 모든 것이 날아갈 수 있었지만 그는 이를 결행했다.

이후 일제의 식민정책 전환과 민중들의 칭송을 받는 최부자를 파산시킬 경우 심각한 민심동요가 우려된다는 지적을 받아 일제는 상환유예 조치를 취했다.

해방이 되면서 고스란히 재산을 지켜내게 된 최준은 1947년 다시 한번 중대 결심을 한다. 어차피 국가에 바친 재산인데 국민들의 신뢰로 되찾았으니 이를 대학 만드는 데 쏟아붓기로 한 것.

최준이 학교 만들 결심을 한 것은 국권을 뺏긴 이유가 깨어 있지 못한 국민들 탓이라고 판단해서다. 그래서 해방이 되자마자 어떤 사업보다 육영사업에 몰두했다.

◆주도적으로 대구대 설립

1945년 10월 30여 명의 지역 유지들이 모여 대학설립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대구경북의 유지와 재산가들을 설득해 참여를 유도했고 본인이 앞장서서 현금 40만원과 7천200여 권의 도서, 땅, 건물 등을 기증해 1947년 대구대를 개교시켰다. 이로 인해 현재 경주시 교동 최부자집 일대 부지는 영남대재단 소유로 등기돼 있다. 기증한 서적 중에는 희귀본도 있는데 영남대는 지금도 중앙도서관에 그의 이름을 딴 '문파문고'를 만들어 보관 중이다.

손자 최염 회장이 전하는 일화 한 토막. 최준은 대학을 만들 당시 손자(당시 20세)에게 "남은 재산을 대학에 기부하려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다소 섭섭함은 있었지만 할아버지의 면면을 알기에 기꺼이 동의했다고 한다.

대구대를 만들고 남은 돈은 6'25전쟁 이후 서울에서 경주에 내려온 학자들과 교수들을 위해 경주계림대학을 만드는 데 전부 쏟아부었다. 소설가 김동리의 형 김범부의 적극적인 권유에 힘입었다. '경주 최부자 500년의 신화'에는 이때 투입된 재산이 대지 1만1천442평, 과수원 9천536평, 전답 1만2천772평, 임야 8천973평, 건물 16동 351평, 산림 276정보라고 기록돼 있다.

1955년 개교했으나 전쟁을 피해 경주로 왔던 교수들이 거의 떠나자 부득이 2년 뒤 휴교하면서 대구대와 통합했다.

이로써 최준이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은 완전히 대구대 소유가 됐다. 최염 회장은 "이때도 할아버지가 내게 의견을 물었지만 할아버지의 고귀한 뜻을 따랐다. 유산으로 받았다가 부도라도 났다면 조상들 얼굴에 먹칠을 할 수도 있었다. 재산 만석을 받는 것보다 조상들의 명예가 훨씬 더 낫다"고 했다.

◆영원한 만석꾼

최준이 대구대에 쏟은 정성은 엄청났다. 교직원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줬고 자금난에도 불구하고 기여입학은 일체 못하게 했다. 당시 상당수 사립대학의 기부입학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모든 재산이 학교 설립에 들어가는 바람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다가 삼성 이병철에게 대학 운영을 위임했다. 이후 이병철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학교를 넘기게 되고, 대구대는 역시 대구의 사립대였던 청구대학과 합병, 영남대로 이름을 바꾼다. 이에 대해 최염 회장은 "정말 할 말이 많다. 영남대는 특정인이나 특정 단체의 소유가 아니라 기증자의 뜻에 따라 대구경북민의 자산이어야 한다는 것이 후손들의 생각이다."고 말했다.

'경주 최부자 500년의 신화' 저자인 동의대 최해진 교수는 "후손들이 가지는 조상에 대한 자긍심과 감사, 은혜의 마음은 새로운 씨앗이 되고 뿌리와 줄기, 잎이 되어 언젠가는 다시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했다.

최부자는 스스로 만석꾼의 지위를 반납했지만 그 정신은 후손들과 국민들의 마음속에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최정암기자 jeong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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