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는 빙수다"…너를 사랑 할수밖에 없구나

더위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치명적 매력의 팥빙수. 요즘은 녹차빙수, 홍차빙수 등 다양한 빙수들이 각광 받고 있다. 사진은 중구 공평동 카페 루시드의 녹차빙수, 팥빙수, 홍차빙수.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더위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치명적 매력의 팥빙수. 요즘은 녹차빙수, 홍차빙수 등 다양한 빙수들이 각광 받고 있다. 사진은 중구 공평동 카페 루시드의 녹차빙수, 팥빙수, 홍차빙수.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빙수야~ 팥빙수야~ 사랑해 사랑해~♬"

장마가 끝나고 난 뒤 이글이글 끓는 본격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빙수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햇볕이 강하면 강할수록 찬 음식에 대한 열망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 빙수는 고체에서 액체로 변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즐기는 음식이다. 입안에 닿는 순간 이미 사르르 녹아내려 물로 변해버리는 얼음의 청량감은 더위에 늘어진 피부의 모공까지도 바짝 조여주는 듯한 서늘함을 온몸에 선사한다.

◆얼음과 팥의 운명적 만남

대구를 비롯한 영남지역에서는 예전에 빙수를 '빙설'(氷雪)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사실 빙수의 맛은 얼음이 상당부분 좌우한다. 어떤 빙삭기를 쓰느냐에 따라 얼음을 잘게 부순 것처럼 으깨버리는 오독오독 얼음이 씹히는 맛이 살아있는 빙수도 있고, 눈처럼 보들보들한 결이 곱게 살아있는 부드러운 빙수가 되기도 한다. 얇은 눈이 켜켜이 쌓인 듯한 빙수를 좋아하는 이들은 "방언이긴 하지만 빙설이라고 부르는 편이 팥빙수의 특성을 제대로 표현한 단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얼핏 재봉틀과도 닮은 듯한 무쇠로 만들어진 파란색 모양의 기계에 커다란 판얼음을 끼워 빙수를 만드는 얼음을 갈았다. 커다란 氷(빙)자가 쓰여진 겉보기에도 묵직한 그 기계에 얼음을 끼운 후 핸들을 돌리면 마치 대패질을 하는 것처럼 얇은 얼음이 서걱서걱 깎여 나왔다. 이것이 바로 '빙설'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로 추측된다. 이제 이 파란색의 빙수 기계는 골동품 가게를 뒤져야 겨우 그 모습을 구경할 수 있을까 사용하는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대신 요즘 대부분의 가게에서는 전동식 빙삭기를 쓴다.

팥은 얼음과 함께 빙수의 맛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가수 윤종신 씨의 '팥빙수'라는 노래 가사처럼 팥은 일단 팔팔 끓여 푹 삶은 뒤 설탕을 넣어 다시 은근한 불로 서서히 졸여서 만든다. 요즘은 직접 팥을 졸여 빙수를 만드는 곳은 많지 않다. 대부분이 미리 만들어 캔에 담긴 제품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 중 상당수는 중국산 팥을 사용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맛을 좌우하는 핵심 포인트인 만큼 내로라 하는 소문난 빙수 가게는 팥에 유난히 신경을 쓴다. 통통한 질감이 살아 있고, 너무 달지 않은 고소함이 느껴져야 맛있는 빙수라고 할만 하다.

◆빙수의 진화

어릴 때는 학교 앞에서 간 얼음에 팥을 넣고, 미숫가루와 빨갛고 파란 색소로 맛을 낸 빙수가 최고였고, 조금 더 철이 든 뒤에는 동네 제과점 팥빙수에 입맛이 길들여졌다. 1970, 80년대는 제과점 팥빙수가 대세를 이뤘던 시절이었다. 동네 제과점에 '팥빙수 개시'라는 종이가 나붙을 때쯤이면 "정말 여름이 시작됐구나"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때 팥빙수에 빠져서는 안 될 토핑이 젤리와 프루츠 칵테일, 그리고 찹쌀떡이었다.

이후 팥빙수는 진화를 거듭해 위에 무엇을 얹느냐의 경쟁이었다. 요거트, 아이스크림, 시리얼, 초콜릿, 견과류 등 토핑의 재료는 무한 확장을 계속해갔다. 얼음보다 위에 얹는 토핑의 양이 더 많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제왕의 자리를 점했던 것은 수박과 복숭아 등 각종 과일을 듬뿍 얹은 과일빙수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흘러 요즘은 '미니멀'이 대세다. 무엇을 더 얹느냐의 경쟁에서 이제는 얼마나 단순하고 깔끔한 맛을 선보이느냐로 관심이 옮아간 것. 녹차빙수, 홍차빙수, 우유빙수 등이 인기를 얻으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이들 메뉴에는 팥, 견과류 혹은 찰떡 조금이 토핑의 전부다. 본래 가진 맛의 성격이 강하다보니 오히려 다양한 토핑을 얹을 경우 맛을 더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빙수의 가장 큰 조력자인 '팥'을 뺀 빙수도 등장하고 있는 추세다.

올해는 10만원짜리 '황제 팥빙수'도 등장했다. 웨스턴조선호텔 로비 라운지에서 선보인 이 최고가 빙수는 '황제'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얼음부터 차별화했다. 은근한 단맛이 나는 자작나무 수액인 '이로수'를 얼린 얼음을 사용해 얼음만 먹어도 감칠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한 것. 토핑 역시 남다르다. 황금가루와 벨루가 캐비어, 마, 인삼정과, 애플망고, 복분자 등 최고급 건강 재료를 곁들였다고 한다.

◆빙수의 유래

인류가 빙수를 먹기 시작한 것은 꽤나 오래된 일이다. 그 시작은 기원전 3000년경 중국에서 눈이나 얼음에 꿀과 과일즙을 섞어 먹은데서 찾을 수 있다. 유럽에서는 기원전 300년경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점령할 때 만들어 먹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병사들이 더위와 피로에 지쳐 쓰러지자 높은 산에 쌓인 눈을 가져다 꿀과 과일즙 등을 넣어 먹었다는 것. 또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인 카이사르는 알프스에서 가져온 얼음과 눈으로 술과 우유를 차게 해서 마셨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얼음을 잘게 부숴 화채 등을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음식문화평론가 윤덕노 씨는 " '성호사설'을 쓴 이익은 얼음쟁반에 신선한 연근과 참외, 과일 등을 담아 먹으며 여름에 더위와 갈증을 달랜다고 했다"며 "조선 초기 문인인 서거정 역시 '얼음쟁반에 여름 과일을 띄워라/오얏 살구의 달고 신맛이 섞여 있다'라는 시를 읊었고 또 '얼음쟁반에 담은 과일에 치아가 시리다'는 시도 남겼다."고 했다.

현재 여름철 가장 즐겨 먹는 팥빙수의 유래는 일본에서 찾을 수 있다. 윤 평론가는 "기록을 보면 처음 빙수를 맛본 한국인은 고종 때인 1876년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김기수인 것 같다"고 했다. 기행서인 '일동기유'(日東記游)에 일본왕을 접견한 후 외무대신 등과 식사를 하며 빙수 종류의 디저트를 먹었다는 기록을 남긴 것. 윤 평론가는 "'유리 술잔에 얼음으로 만든 즙을 담고 계란과 설탕을 넣었는데 맛이 달고 상쾌해서 먹을만 했지만 너무 차가워 많이는 먹을 수 없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짐작해보면 빙수 혹은 서양 셔벗의 일종인 것으로 짐작된다"고 했다. 일본에서 빙수 파는 가게가 처음 생긴 것은 1869년 요코하마에서다. 윤 평론가는 "1887년에 얼음을 갈 수 있는 기계가 발명돼 빙수가 널리 보급됐으니, 현대 빙수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며 "게다가 빙수에 단팥을 얹어 먹은 것은 더 나중의 일"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잘게 부순 얼음 위에 차게 식힌 단팥을 얹어 먹는 팥빙수는 일본음식인 '가키고오리'가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이라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기존에 팥과 친숙했던 우리 먹을거리 문화에 팥빙수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 여기에 다양한 맛을 즐기는 비빔밥식의 우리식 변형이 더해지면서 지금의 팥빙수 형태로 발전했다는 풀이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대구지역 이름난 빙수 가게

▷루시드(LUCID)=네티즌들이 대구지역 '빙수의 메카'라고 추천한 곳이다. 가장 인기 있는 녹차빙수를 비롯해, 홍차빙수, 팥빙수를 판매한다. 봄에는 딸기빙수를 맛볼 수도 있다. 녹차빙수는 일본에서 가져온 말차(가루 녹차)를 사용한다. 특유의 떫은맛은 적고, 녹차의 깊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위에 하겐다즈 녹차 아이스크림과 맛있는 찰떡을 큼지막하게 얹어준다. 팥은 빙수를 비벼보면 아래쪽에 숨어 있다. 통통하게 씹히는 맛이 살아있는 팥알과 견과류가 고소한 맛을 더한다. 팥은 국물이 없는 통팥 알만을 쓴다. 초록색 녹차에 검은 팥물이 배어 나는 것을 막고 가급적 깔끔한 맛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위치: 중구 공평동 신피부과 안쪽 골목 150m 지점, 가격: 1만3천원(2인)

▷모가(moga)=한옥을 개조해 만든 전통적인 인테리어가 매력적인 카페인 만큼 빙수도 전통식이다. 이곳에서 맛볼 수 있는 빙수 메뉴는 유기농 팥빙수와 녹차빙수. 특히 이곳에서는 유기농 팥에다 유기농 설탕을 넣어 직접 삶아 팥고명을 만든다는 점이 특색이다. 잘게 간 얼음에다 직접 삶아 맛은 물론 건강함까지 듬뿍 담겨 있는 팥을 붓고 쫀득한 찹쌀떡이 얹어 내놓는다. 우유와 미숫가루, 너트는 원하는 만큼 부어 먹을 수 있도록 따로 담아내는데 옛날식 팥빙수의 소박한 맛을 즐기는데 제격이다. 그 외에도 모가에서는 수제케이크와 쿠키를 즐길 수 있다. 위치: 대구 중구 대봉동 40의 17번지. 청운맨션 맞은편 우리은행에서 경대병원 방향으로 향하는 방향 두 번째 골목 안, 가격: 9천원

▷커피명가 캠프점=우유빙수가 인기다. 우유를 그대로 얼린 뒤 이것을 빙수기에 갈아서 만든다. 고명으로는 팥과 아몬드만 듬뿍 얹기 때문에 깔끔한 맛을 즐길 수 있는 미니멀한 빙수 아이템이다. 자칫 심심할 수 있는 맛일 수도 있지만 우유의 부드러움에 아몬드의 고소함이 더해져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커피명가 대부분의 지점에서 판매하고 있지만 일부 매장에서는 맛볼 수 없는 곳도 있다. 위치: 중구 계산동 계산성당 옆 매일신문사 빌딩 1층, 가격 4천500원

▷해맑은 문고+(일리)=여름메뉴로 커피빙수와 딸기빙수가 있다. 새콤달콤한 맛을 원한다면 딸기빙수가, 깔끔하면서도 달지 않은 쌉싸래한 맛을 원한다면 커피빙수가 제격이다. 커피빙수는 진하게 내린 커피에 설탕을 넣어 시럽형태로 만들어 얼음 위에 붓는다. 토핑으로는 까메오 쿠키가 얹힌다. 딸기는 제철이 아닌 만큼 냉동딸기를 사용한다. 통유리로 시원하게 트인 신천을 내려다보며 빙수를 먹으면 입은 물론이고 가슴까지 서늘해지는 느낌이다. 서점 기능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곳이란 점도 매력. 위치: 대구 중구 대봉동 대백프라자점 4층, 가격:7천800원

▷그 외에 트위터를 통해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야구를 즐기며 먹을 수 있는 미숫가루 듬뿍 든 팥빙수와, 달서구 수변공원 인근에 있는 카페 뺑드깜파뉴의 우유빙수, 대명동 경북예고 앞의 카페 커피앤의 녹차빙수, 코페아커피 매장의 와인빙수 등을 추천했지만 시간관계 상 모두 확인하지는 못했다.

덥다고 급하게 빙수를 퍼먹는 것은 금물. 취재 때문에 하루 두 곳씩 빙수가게 찾아다니며 빙수를 먹었더니 뒷목이 뻣뻣해지고 관자놀이가 뻐근해오거나 입안이 얼얼해지면서 통증까지 유발됐다. 빙수를 통한 피서(避暑)도 정도껏 즐길 일이다. 한윤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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