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신라와 경상도와 일본

'654년 2월 (견당 유학생) 지종(智宗)이 신라 배를 타고 귀국했다. 657년 사인(使人)을 신라에 보내 "사문 지달(智達) 등을 신라국에 부탁하여 대당(大唐)에 보내려고 한다"고 말했다. 신라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달 등이 귀국했다. 658년 7월 사문 지달 등이 신라의 배를 타고 대당에 가서 현장 법사한테 배웠다….'(일본서기 기사 중)

"…아직 뵙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고풍(高風)을 듣고 있습니다… 이 엔닌(圓仁)은 인덕을 입고도 공경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엔닌은 당경(唐境)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엔닌은 고향을 하직할 때 츠쿠젠 태수의 서신을 받아 (장보고) 대사에 올리려고 하였습니다. 배가 여울에 가라앉아 자물(資物)도 표실(漂失)되었습니다. 부탁받은 서신은 파도를 따라가 가라앉았습니다…."

"…청해진을 경유해 본국(일본)으로 가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장보고 대사에게 가시어 상세한 사정을 말씀드려 주십시오… 혹 그쪽 인선(人船)의 왕래가 있으면 청하옵건대 고명(高命)을 내려 특히 보살펴 주십시오. 승(僧)들의 귀향은 오로지 하해와 같은 구원에 의지합니다…."(이상 일본 유학 승려 엔닌의 글)

1천 년 전 일본은 뒤떨어진 조선술과 항해술로 중국 파견 사신과 유학생, 유학 승(僧)들의 입당과 귀국 때 배편이 문제였다. 앞선 항해술과 조선술을 가진 신라 도움을 받아야 했다. 사람뿐 아니라 편지와 돈, 물자까지도 신라인과 신라 배로 전달되기도 했다. 9년간의 당 유학 뒤 840년 엔닌도 장보고와 심복 최훈에게 편지를 보내 장보고 휘하 김진의 배로 귀국했다고 기록했다.

신라와 일본은 일찍부터 교류했다. 신라는 591년 일본 창구인 왜전(倭典)을 두었고 당 건국(618년) 후 나당 교섭을 위해 621년 이를 영객전(領客典)으로 개편했으며 왜전을 따로 설치했을 정도였다(삼국사기).

신라는 선진 문물도 전파, 백제와 함께 일본 문화의 바탕이 됐다. 신라인을 보내 왕(王)을 치료하기도 했다. 신라 율령(律令)은 일본 율령의 모델이 됐고 원효 등의 신라 불교는 일본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일본은 일본서기 등 육국사(六國史)를 통해 신라의 '도움'과 달리 지배를 했다는 등 특히 신라 역사 왜곡과 임진왜란'식민 지배라는 악연으로 답했다. 8월 2일 일본 자민당 의원의 울릉 방문에 따른 갈등은 울등도'독도를 지배했고, '도움을 준' 신라 땅, 경상도에 대한 '배은'(背恩)이다.

정인열 중부지역본부장 oxe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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