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옛길기행] <32>상주 '똥고개길'

북천 내려다 보며 세상사 시름 내려놓고 쉬어가라는 듯…

물이 철철 넘치는 북천과 서보 전경.
물이 철철 넘치는 북천과 서보 전경.
멀리 보이는 산의 오목 들어간 부분이 똥고개이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멀리 보이는 산의 오목 들어간 부분이 똥고개이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1반구 근처 바위에
1반구 근처 바위에 '수석정'이라는 글자가 음각돼 있다.
사람들이 즐겨 목욕을 하던 1반구.(가을철 사진)
사람들이 즐겨 목욕을 하던 1반구.(가을철 사진)

7월 29일부터 도로 이름을 딴 주소가 법적으로 확정, 사용되면서 미래에 특정 위치를 찾기가 쉬워질 수 있으나 우리의 역사와 전통'유래'전설 등을 담고 있는 고유의 마을 이름은 이제 어쩌면 '과거'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

전국 곳곳에서 100년 만에 바꾼 새 주소 사용에 따른 혼란과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아직도 유래나 전설 등을 바탕으로 정해진 마을이나 도로 등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농촌지역에서는 새 주소 사용으로 자칫 마을 고유의 전통과 정통성을 잊어버릴까 하는 우려도 높다.

따라서 이번에 돌아본 '똥고개길' 등 그 마을만의 전설을 머금고 있는 옛길이나 마을 이름의 유래를 찾아 고증해 두는 작업은 공공기관이나 단체, 개인이든 누구나 앞장서서 해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신(新)낙동강 시대를 맞아 경북 '슬로시티 1호'로 지정되면서 부각되고 있는 상주는 낙동강의 어원을 간직하고 있는 고장이다. 낙동강은 '낙양'(洛陽'상주의 옛 지명)의 동쪽에 있는 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상주는 조선 초기에 경상감영이 위치해 경북과 대구, 경남지역까지 관할하면서 낙동강 물길로 인해 더욱 번성할 수 있었다. 경상도 남쪽 지역에서 거둬들인 조세를 모두 물길을 따라 배로 '낙동나루'로 옮겨와 문경의 조령을 거쳐 한양으로 운송했던 것도 '낙동강 물길'이다. 물길과 연결돼 경상도 선비들이 '조령'을 넘어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길이 바로 지난번에 소개한 '영남대로'(嶺南大路'본지 4월 13일자 보도)이고, 그 주변으로도 상주 사람들의 애환과 전설이 담긴 많은 길이 낙동강 물길과 연계해 자리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똥고개길'도 그 중 하나다.

상주시는 산과 강, 그리고 들길을 잇는 MRF(Mountain'River'Field) 이야기 체험 코스를 마련, '슬로시티'를 찾는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상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벌꿀과 프로폴리스, 곶감, 막걸리 등 슬로푸드와 옹기, 명주 등 슬로 문화와 함께 가족들과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길을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상주시가 야심 차게 내놓은 MRF길은 현재 3개 권역, 13개 코스로 낙동강에 4개, 상주시내에 4개, 이안천에 5개가 있으며, 코스별 거리는 6.6㎞에서 42.7㎞로 다양하다. 2시간부터 12시간이 소요되고, 21개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MRF길은 반드시 산'강(하천)'들길을 포함하고 스토리가 있어야 하며, 해발 200~300m의 낮은 산과 원점으로의 회귀가 가능해야 한다.

MRF길들은 모두 평탄하면서 경사가 완만하고 아름다운 비경에다 관광지를 연계, 개발됐기 때문에 한번쯤 걸어보면 다음에는 가족,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을 것이다. 'MRF 동호회'가 매월 넷째 주 토요일 탐방을 실시하고, 가이드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들 13개 코스 중 이름은 이상하지만 누가 들어도 정감을 느낄 수 있다는 '똥고개길'을 한번 걸어 보았다.

◆'똥고개길'의 유래

상주시의 MRF (문화예술)담당인 전병순 계장으로부터 '똥고개길'이란 얘기를 듣고 귀가 의심스러워 되물었다. 뭔가 잘못 들은 듯해서였다. 하지만 재차 답변에도 분명 "똥고개길"이라고 했다. 그 많고 많은 이름 중 '똥고개길'이란 이름이 붙은 사연은 이러했다.

나무를 땔깜으로 사용하거나, 팔아서 생계를 꾸려가던 조선시대. 한여름에 이 지역의 한 나무꾼이 오랜 장마로 양식이 떨어지자 가족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무더위를 무릅쓰고 비지땀을 흘려가면서 뒷산 정상인 '국사봉' 부근에서 나무를 한 짐 한 후 땀을 식히기 위해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고갯마루로 바쁘게 올라갔다. 힘겹게 올라가는 중 갑자기 배가 사르르 아파 고갯마루에 오르지도 못한 채 그만 볼일을 보게 됐다. 앉아서 '끙끙' 거리고 있는데 바로 앞에 똥이 묻은 이상한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꾼은 호기심에 나무 막대기로 묻은 똥을 긁어내고 자루를 풀어보니 그 속에 돈이 가득 차 있는 것이었다.

나무꾼은 "이것이 웬 횡재냐?"면서 누가 볼까 봐 지게의 나무를 절반으로 줄이고는 그 속에 돈 자루를 감춰 집으로 돌아왔다. 나무꾼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다가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이웃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영문도 모르고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받은 이웃들은 하나같이 잔치를 한 이유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됐고, 결국 나무꾼은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그때부터 이 마을 사람들은 그 산의 정상을 '돈고개', 또는 똥이 묻은 돈 자루를 주웠던 고개라 하여 '똥고개'라 불렀다. 이와 별도로 그 고갯마루가 나무꾼들의 쉼터로, 누구든지 주변에 와서 쉬면서 대'소변을 보기 때문에 '똥고개'라 불리게 됐다. 개운동에서 바라보면 산의 잘록 들어간 중앙 부분이 사람의 항문처럼 생겼다는 유래와 함께 지금까지 그곳으로 가는 길이 '똥고개길'로 불리고 있다.

아무튼 '똥고개'는 정감을 주는 이름임은 물론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임에는 틀림없다.

◆북천시민공원에서 출발

똥고개길(총 8.9㎞, 2시간 40분 소요) 출발점은 상주시내를 가로지르는 북천(北川'상주의 북쪽 하천)의 둔치를 공원화한 '북천시민공원'. 벚나무 제방길을 통해 하천 오른쪽 후천교 밑으로 나있는 돌다리를 다시 건너거나 둔치를 그대로 따라가면 '연원교'에 다다른다. '북천시민공원'에서 연원교까지는 1.7㎞로 25분쯤 걸린다. 다리를 건너 북천 옆으로 올라가면 쑤안동네 우측에 '1반구'가 있다. 어릴 적 상주에서 자란 4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목욕을 했던 곳으로, 누구나 추억을 갖고 있는 곳이다. 이곳 연원동 '흥암서원'(興巖書院)과 인접한 북천 '1반구' 옆 바위에는 '수석정'(水石亭)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흥암서원'은 1702년(숙종 28년)에 창건한 사액서원으로 동춘당 송준길 선생을 봉안하고 그 유덕을 기리며 후학을 교육했던 곳이다.

이 서원에서 공부했던 유생(儒生)들은 상주를 비롯해 인근에 거주하는 젊은이들로, 여름이면 학과를 끝내고 '1반구'에서 목욕을 하면서 시간을 즐기는 것이 큰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유생 가운데 '칠수'(七修)라는 젊은이가 과거시험에 6번 떨어진 뒤 7번째 시험을 준비하던 중 삼복더위에 유생 20여 명과 '1반구'에서 목욕하다가 물 속에서 너무 오래 있었던 나머지 추위를 느끼게 되자 햇볕에 몸을 말리기 위해 바위에 올라가 있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칠수'는 꿈을 꾸었다. '흥암서원' 옆 북천 냇가 바위 위에 있는 아름다운 정자에서 주변 풍경을 벗 삼아 과거시험 준비에 몰두했다. 그해 과거시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특별 시험을 봤고 열심히 익힌 글공부 기량을 발휘, 과거시험에 붙어 왕을 만나고 귀향해 자신이 공부했던 정자로 일가친척 및 유생들을 초청해 산해진미를 더해 주연을 베푸는 순간 개미 한 마리가 허벅지를 무는 바람에 잠을 깨고 말았다.

꿈이 너무나 또렷한 나머지 "올해 반드시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꿈이니 공부에만 전념하라"는 스승의 뜻을 되새겨 열심히 공부를 해 과거시험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자, 꿈을 꾸어 소원을 이룬 '1반구'에 '수석정'이라는 글씨를 새긴 것이다.

그 후부터 누구나 목욕을 하고 '수석정'이 새겨진 바위에서 꿈을 꾸면 소원성취를 하는 곳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수영을 했다. 하지만 현재는 이 일대가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어서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아마 이곳이 지금도 일반인들에게 개방돼 있다면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이 목욕을 하러 몰려드는 명소가 됐을 것이다.

이어 남장동으로 연결되는 제방길을 따라 5분(0.5㎞)쯤 가면 우측 냇가 건너편의 자연부락인 '가지넘이' 동네가 보이고, 멀찌감치에는 '서보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농요 '서보가'를 낳게 했던 '서보냇가'이다. 여기에서 다리를 건너면 정자가 나타나고, 이어 쉬엄쉬엄 걸어서 1.1㎞(30분)쯤 '너라골' 마을 앞 잠수교를 건너 갈림길에서 이정표를 만난다. 정자는 여름철 들판의 파란 벼를 바라보며 더위를 식힐 수 있는 농촌만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휴식처. 여름철에 선점하면 모기장을 치고 자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

'너라골' 마을로 접어들어서 왼쪽 농로로 굽었다가 도랑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꺾어 산으로 이어진 길로 오르면, 잡풀이 무성한 묵은 농경지가 나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농사를 지었지만 교통이 불편한 나머지 이젠 여기저기 농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나무꾼들이 '똥고개'에서 변을 보았던 시기만 해도 이곳 농경지는 그래도 '1급지'였을 것이다. 그 당시엔 산 정상에 이르는 길목 군데군데 개간해 만든 밭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왼쪽의 묵은 밭 사이로 올라가면 그 이름도 유명한 '똥고개'가 나온다. '너라골'에서 '똥고개'까지는 1.2㎞로 20분가량 소요된다.

올라가면서 '똥고개'의 유래를 머리에 떠올리면 '격세지감'(隔世之感'많은 변화로 갑자기 딴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느끼게 된다. 아버지와 형, 그리고 아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어머니와 딸이 생계를 위해 오르내리던 고갯길을 이제는 건강을 위해 찾는 곳으로, 자연의 기능 자체가 변해 버린 것이다. 이곳에서 땔감을 해 지게에 지고 시장에 내다 팔아 쌀과 고등어 등 배를 채울 음식을 사 가지고 집으로 향할 때는 피로가 단숨에 사라져 버리고 흥겨운 콧노래를 불렀을 아버지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구간이다.

여기서 여러 갈래 중 좌우측으로 나 있는 능선길은 백두대간 상의 '백학산'에서 가지를 뻗어 '국사봉'과 '똥고개'를 거쳐 '주산'을 지나 '사직단'에 이른다.

여기서 앞쪽으로 난 완만한 길로 내려가면 민가가 나오고 좌측으로 난 고개를 넘어 동네 안길을 걸어 '개운교'에서 군부대(1.6㎞, 25분)를 지나 '낙양천' 제방을 따라 연원교를 거쳐 2.1㎞(30분)가량 걷다 보면 어느새 북천시민공원에 이르게 된다.

상주'황재성기자 jsgold@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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